우리는 대형 사고를 겪고 나서 꼭 하는 말이 있다. 예견된 인재다,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았다, 소잃고 외양간 고친다 등등. 아무리 시스템이 완벽하더라도 다루는 자가 인간인 이상 오류의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원자력발전소의 사고 가능성이 없다는 얘기가 그래서 어이 없는 거다. 시스템으로 움직이기는 전쟁도 마찬가지다. 현대전은 고도의 통신장비와 미사일, 위성장비를 이용해 수천마일 밖에서 적을 없앨 수 있다. 근처에는 가지도 않고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 현대의 첨단전쟁 시스템이다. 이 영화는 이러한 시스템과 그것을 다루는 사람의 오류, 그리고 인간성에 대한 고뇌를 다루는 영화다. 화면이라고는 회의장과 테러범 은거지, 미사일 발사대 정도만을 보여주는 단조로운 구성이지만 던지는 메세지의 강렬함은 블록버스터 이상이다.
영화는 영국정부가 대규모 테러 첩보를 입수하는데에서 시작한다. 이어진 영국과 미국, 케냐 정부의 합동작전. 정해진 절차와 시스템, 매뉴얼은 테러 집단을 금새 추적해 내고 자폭 테러단이 생화학 무기를 착용하는 은거지까지 찾아낸다. 하늘의 위성은 그들의 본거지를 겨냥하고, 미사일 발사장치는 오픈된다. 이제, 작전의 승인만이 남은 상황. 작전이 수행되면 테러집단의 머리 위로 미사일이 떨어질 것이고 민간인의 피해는 거의 없을 것이다. 화면을 보고 버튼을 누르는게 전부인 영국군 역시 양심의 가책을 가질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토록 완벽한 시스템에 균열이 생긴다.
균열의 시작은 테러단 중 한 명이 영국 국적자인다는 것이 보고되면서부터다. 죽어도 자국민을 향해 미사일을 쏘지 못하겠다는 국무위원을 군인들이 설득하지만 요지부동. 자국민에 대한 애정 때문이 아니라, 잘못된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되기 싫어하는 위정자들의 위선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총리를 설득하고 외교장관을 설득해서 겨우 미사일 발사가 준비되지만, 이번에는 발사대 버튼을 누를 군인들이 거부한다. 민간인 소녀가 인근에 있다는 것이 그 이유. 이렇게 시스템 요소요소마다 나타나는 정책적, 인간적 장애물의 극복이 이 영화의 관람 포인트다...라고 하면 좋겠지만 일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관객은 시스템의 답답한 관료성을 배경으로 가치관에 대한 검증을 강요당한다. 수천명 이상의 영국민이 살해 당할지도 모르는 위협(아닐 수도 있다)을 없애기 위해 몇명의 테러예측범을 죽이는 것이 온당한가라는 질문, 그것이 온당하다 하더라도 죄없는 민간인 소녀의 목숨은 희생할 가치가 있는가라는 두번째 질문. 마지막으로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시스템을 이용한 군인의 선택이 옳은가라는 애매한 물음까지. 관객들은 답답한 와중에서도 도덕적 가치 판단을 해야 한다. 여기에 책임지기 싫어하는 관료, 정치인 집단의 모습은 끔찍할 지경이다. 고구마로 치면 한 천개쯤일까.
그러나, 이 영화가 던지는 묵직한 메세지는 결코 '재미없어'라고 치부할 만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던져진 많은 생각할 거리들이 영화의 여운을 길게 가져간다. 마지막, 이유도 모른채 숨진 소녀의 모습이 흘러 가는 모습은 그 어떤 반전영화보다 깊은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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