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오래간만에 손에서 놓지 못하고 정신 없이 읽었다. 여성 작가의 자전적 소설임에도 완전히 감정이입할 수 있었다. 전후 세대들이 하나 둘 성년이 되었을 80년대 초반의 이야기다. 한국의 경제는 엄청나게 성장하고 있었고 노동쟁의가 하나 둘 일어나고 있던 때다. 나름 꽃같은 스무살의 친구들이 자라면서 겪는 잔혹한 세파를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잔혹한 현대사를 관통하는 가난한 청춘들의 모습 속에서 안타까움과 함께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
어떡하든 돈을 좀 마련해서 서구보건소로 오라며 전화를 끊는데 속에서 뭔가 왈칵 치밀었다. 경애가 죽었을 때 태용이 어린애처럼 악을 쓰며 울던 것이 생각났다. 우리는 이제 더이상 덴뿌라 하나씩 입에 물고 찐빵 같은 웃음만 지어도 행복한 어린애들이 아니었다. 그것이 서러웠다. 진만이, 승규, 만영이, 태용이, 승희, 정신이, 그리고 나 해금이. 우리 곁애 경애와 수경이가 있었다. 아홉송이 수선화 중 두 송이가 졌다. 그리고 승희가 애를 낳았다. 승희 아이는 새로 핀 꽃송이인가.
'수선화회'라는 이름으로 깔깔 거리던 여고생들과 친구들. 스물이 갓 넘었을 때 이미 두 명이 죽는다. 하나는 80년의 광주에서, 또 하나는 친구를 잃은 충격으로 따라간다.
내가 속상한 거는 수경이가 아프기 때문이 아냐. 왜. 왜 난 수경이처럼 아프지도 않고 밥도 잘 저먹고 잘 처자고 속없이 처웃긷도 잘하고. 그러는 거냐고. 난 그게 승질이 난다고.
이때부터 친구들의 관계에는 균열이 생긴다. 그냥 취업을 선택한 친구, 노동운동에 투신한 친구, 그리고 그들 안에서의 사랑과 우정, 연애까지. 흔한 청춘소설이지만 배경이 80년이 되는 순간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현실이 나타난다.
"혁명을 해? 기왕에 혁명을 하는 김에 사랑도 하재"
화자는 가난한 딸부잣집의 다섯째, 마해금이다. 해금의 눈을 빌려서 보는 세상은 처음은 아름다웠지만 수경의 죽음 이후 이그러지고 비뚤어진다. 결국 노동운동에까지 투신하면서 해금과 정신은 열혈 투사가 되어간다.
상대보다 힘이 세다고, 더 많이 배웠다고, 더 많이 가졌다고, 더 우월하다고 믿는 자들이 부리는 오만과 횡포와 모욕과 폭력과 무례함에 맞서기 위해서라도 우선은 그 오만과 횡포와 모욕과 폭력과 무례함을 견뎌내야 한다고. 그 모든 오만한 자들이, 모든 무뢰배들이 스스로 부끄러워할 때까지, 견디고 견뎌서, 그 견디는 힘으로 우리가 아름다워지자고. 왜냐하면 모든 추함은 모든 아름다움 앞에서 결국 무릎을 꿇게 되어 있기 때문에. 동물에서 출발한 인간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인간이기에, 동물적 본능의 시간에서 조금이라도 인간의 시간을 살기 위해 몸부림 치기 때문이라고, 동물의 시간에서 인간의 시간으로 나아가기 위한 지난한 몸부림의 과정이야말로 진보의 역사라고, 정신은 힘주어 말했었다. 오늘, 저 무뢰배의 오만이 횡행할 수 있는 이 야만의 구조, 이 동물적 상황을 나는 견뎌야 한다. 저항하기 위해 견딜 석. 아름다워지기 위해 지금은 견딜 것.
저 시절은 어쩔 수 없는 투쟁의 시대였다. 그들은 유독 별나지도 않았고 많이 배우지도 않았다. 그저 평범한 여고생들이 운동가로 변해가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시대. 안타깝고 슬픈 현대사지만 실제로 있었던 역사다. 그러면서도 현대사에 너무 함몰되지 않고 적절한 밸런스를 유지하고 있는게 이 소설의 장점. 끝까지 여고생 특유의 감성을 놓치 않는 게 매력적이다.
나는 힘차게 달렸다. 내 머리카락과, 내 눈물과 함께 꽃향기 바람에 날리는 봄밤이 이제 막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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