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짓는 것보다는 밭을 갈라고 한다. 그러나 밭을 가는 그것이 벌써 시가 아니냐. 사람은 흙에서 나와서 흙에 돌아간다. 흙의 방순한 냄새에 취할 수 있는 자의 행복이여! 흙의 북돋아오르는 생기야말로, 너 인간의 끊임없는 새 생명이니라...'
수능을 위해서 공부를 하다 보면 염상섭이라는 작가는 읽어보지도 않은 '삼대'라는 작품으로 기억하기가 십상이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넘어갈 만한 작가가 아니다. 그의 작품은 단순한 식민지의 저항문학을 넘어서 사회적 현상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진보 소설의 위치를 가지고 있다.
'조반 후의 낮잠은 위약'이라는 고등 유민의 유행병에나 걸릴까 보아서 대팻밥 모자에 연경이나 쓰고, 아침저녁으로 호미자루를 잡는 것이 행복스럽지 않고 시적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저러나, 일 년 열두 달, 우마 이상의 죽을 고역을 다 하고도, 시래기죽에 얼굴이 붓는 것도 시일까? 그들이 삼복의 끓는 햇밫에, 손등을 데면서 호미 자루를 놀릴 때, 그들은 행복을 느끼는가? 그들은 흙의 노예다. 자기 자신의 생명의 노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있는 것은 다만 땀과 피뿐이다. 그리고 주림뿐이다. 그들이 어머니의 뱃속에서 뛰어나오기 전에, 벌써 확정된 유일한 사실은, 그들의 모공이 막히고 혈청이 마르기까지, 흙에 그 땀과 피를 쏟으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열 방울의 땀과 백방울의 피는 한 톨의 나락을 기른다. 그러나 그 한 톨의 나락은 누구의 입으로 들어가는가? 그에게 지불도는 보수는 무엇인가- 주림만이 무엇보다도 확실한 그의 받을 품삯이다.
'삼대'를 읽기 전에 '만세전'을 비롯한 4개의 중편을 먼저 접해 본다. '문학과 지성사'에서 낸 염상섭 중편선 '만세전'에는 표제작과 해바라기, 미해결, 두 출발이 실려 있다. '만세전'은 동경에서 유학중인 지식인이 아내의 부고를 접하고 돌아오는 여정을 담고 있다. 가족과의 애틋함이 없기에 의무적으로 오는 길목에서 만나게 되는 감시자들(일본인), 비루하게 살고 있는 피지배층(조선인들)을 번갈아 만나면서 식민지의 처참한 시대상을 보여 준다. 그러면서도 다른 대안을 내놓지 못한 채 술과 기생에 빠진 무기력한 지식인의 모습을 극 중앙에 놓으면서 나름의 정당화를 위해 노력한다. 나는 왜 이 무지한 백성들 사이에서 태어났는가 하는 고뇌를 곱씹으면서...
"겨우 무덤 속에서 빠져 나가는데요? 따뜻한 봄이나 만나서 별장이나 하나 장만하고 거드럭거릴 때가 되거든요...!"
신혼 여행지로 옛 연인의 제사지를 찾는 <해바라기>, 추리소설의 성격을 띄고 있는 <미해결>은 식민지 성격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인물 중심의 소설이다. <해바라기>는 신여성이라는 이미지 위에 자유로운 연애상과 전통적 가치가 충돌하는 모습을 입체적으로 담았다. <미해결>은 기독교 문화가 우리 사회에 들어오면서 만들어진 새로운 사회적 구조, 그리고 그 구조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한 여인의 자살을 통해 조망한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흥미있었던 작품이다. 마지막으로 <두 출발>은 식민지 시대에서의 두 신분 - 양반과 상민 - 이 어떤 돌발적인 사건으로 인해서 새로운 삶을 찾아 나선다는 이야기이다. 양반은 개화하고 일본인 관리의 주변을 맴돌고 있지만 결국 재산을 다 잃게 될 것은 명확해 보인다. 상민은 좀 더 적극적으로 삶을 개척해 나가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점에서 염상섭은 무산자 계급에서 좀 더 밝은 빛을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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