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수레의 책읽기

[갈라파고스] 진화의 시발점이 된 세기의 자연유람

슬슬살살 2018. 10. 24. 22:15

오늘날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고문이란 상상하기 힘들다. 지느러미 몇개와 주둥이 하나로 고문 상대를 어떻게 붙잡는단 말인가? 그토록 빨리 헤엄치고 그토록 오랫동안 물 속에 머무를 수 있는 인간을 어떻게 사냥한단 말인가? 당신이 뒤쫒는 상대는 다른 사람들과 쉽게 구분이 안 될 뿐 아니라, 아무리 깊은 곳이라고 내려가서 꼭꼭 숨어버릴 것이다.


창조론과 진화론. 당신은 무엇을 믿는가. 아마도 대다수의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진화론을 더 신봉할 것이다. 물론 영적인 측면에서의 창조론도 상당히 신빙성 있는 가설이기는 하다. 그러나 모든 생명체 안에 '진화'라는 프로그램이 기본 어플로 장착되어 있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인간은 과거에 원숭이인적은 없지만 그와 유사한 존재였다.


네안데르탈인이 인류의 조상인 건 맞다. 그렇다면 1백만년 후 인류의 모습은 어떨까. 당연히 지금과는 다른 모습일게다. 그런데 그 진화가 동물에 가깝게 변한다면 어떨까. 진화라는 게 현대인의 눈에서 긍정적인 방향만으로 일어날 거란 보장이 어디 있냐는 말이다.

 

갈라파고스는 자연선택의 법칙이 최악의 우연을 만날 때를 가정한 소설이다. 갈라파고스 투어 프로그램에 참여한 여러 사람이 모이지만 경제 불황, 우연적인 요소, 누군가의 복권 당첨, 사별 등의 이유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준비없는 배가 표류하게 된다. 마침, 전 세계적으로 불임 바이러스가 유행하게 되고 한세기가 지나기도 전에 인류는 멸망한다. <갈라파고스>는 이 아포칼립스에 마침 무인도에 표류하게 된 한 집단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정확히는 그들이 표류하게 된 이야기를.


그들이 평범한 인류였다면, 어쩌면 크게 다른 인류가 나오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중에는 희귀 정신병을 가진 남성이 있었고 잊혀져가는 원주민 언어를 쓰는 여성이 3명이나 있었다. 이미 돌연변이로 태어나 털이 많은 동양계 아이도 있었으니 이들 소수개체가 얽히고 섥혔을 때 그들이 끔찍한 모습으로 진화하게 됨은 필연적이었다. 이들의 후손이 다시 지구에 존재하는 순간, 인류의 모습은 지느러미를 가진 털복숭이 개체가 되어 버렸다. 뇌는 현생인류의 1/10으로 줄어들었고.


<갈라파고스>는 이렇게 인류가 퇴화하게 된 원인들을 백만년 전에 일어난 여러 사건들의 총합체로 보고 그 하나하나의 사건을 풀어 내 놓는 소설이다. 묘하게 비꼬는 듯한 말투가 섞여 있어 괴기스러움을 더한다.


델가도는 그 아이들을 그냥 스쳐갔다. 그는 체포되어 처벌받거나 병원에 수용되지 않았다. 그는 군인들로 넘쳐나는 한 도시에서 또 하나의 군인에 불과했으므로 누구하나 그의 얼굴을 주의깊게 살피지도 않았다. 철모 그림자 속의 그 얼굴은 다른 사람들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위대한 생존자 답게 그는 다음날 한 여성을 강간하고, 그리하여 남미 대륙에서 태어날 마지막 1천만명의 아이들 가운데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된다.


투박하고 덤덤한 문체지만 담고 있는 내용은 끔직하다. 혼란한 국가에서 병사가 여성을 강간하는 건 끔찍한 일이지만 기괴한 일은 아니다. 아이가 생기는 것도. 그런데 마지막 아이들이라니. 여기에 더해 1천만명이라는 숫자와 남미대륙이라는 문장은 독자를 혼란에 빠트리기에 충분하다. 남미 전체에서 1천만명이 전부라니.


커트 보네거트의 문체는 이런 식이다. 조금 지루한 면이 있기는 하지만 농담이 섞인 간접적인 문장으로 현상을 전달하고 있어서 속도감 넘치게 글이 읽히지는 않는다. 오히려 읽고 난 후  곰씹게 되는 기괴함이 압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