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는 판타지 소설이다. 엘프가 나오거나 기사, 불을 뿜는 용이 나오는 건 아니지만 전형적인 판타지의 룰을 지키고 있다. 배경은 한국, 한창 산업화가 일어나고 있는 어느 때로 보이지만 그 어디에도 없는 도시 평대와 언제인지 알 수 없는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어쩌면 한국의 패러럴 월드일런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 세계는 현실과 판타지가 적절하게 조합된 어느 세계다. 영화로 치자면 <놈,놈,놈>이나 <군도>를 생각하면 된다.
<고래>는 신화이기도 하며 한편의 서사시다. 금복이라는 여인이 세상에 나와 갖은 고생을 하며 자신의 성을 올리고 몰락하는 과정(심지어 남성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녀의 딸 춘희가 남성성을 가진채 여성으로 살아가는 과정들은 알에서 태어나거나 죽을 때 새가 되어 날아가는 것과 비슷한 여정을 지닌다. 그러면서도 복잡하거나 어려운 서사 대신 조밀조밀하고 유쾌한 전개를 보이고 있어 무겁지도 않다.
그녀는 파랗게 빛나는 고래를 향해 헤엄치기 시작했다. 고래는 거대한 유선형의 몸체를 우아하게 움직이며 그녀를 향해 꼬리를 철썩거리다 이따금씩 힘찬 분기를 보여 주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아무리 헤엄을 쳐도 고래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다. 바로 앞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었고, 매끄러운 거죽이 손에 잡힐 듯 코앞에서 번들거렸지만 고래는 늘 그만큼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고래는 다시 한 번 크게 물을 뿜어낸 후 유유히 꼬리를 흔들며 깊은 물 속으로 사라졌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고래나 코끼리를 이상향으로 삼고 있다. 뭔가 거대한 생명체에 대한 경외와 아름다움을 삶의 목표로 두고 다가가려 하지만 손에 잡히지를 않는다. 그리고 거기에까지 이르는 과정이 순탄치 않고, 실제로는 죽은 후에야 그곳에 이르렀다고 짐작될 뿐이다.
그날 이후, 소녀를 지배한 건 죽음에 대한 공포였다. 그리고 인생의 절대 목표는 바로 그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는 거였다. 그녀가 좁은 산골마을을 떠난 것도, 부둣가 도시를 떠나 낙엽처럼 전국을 유랑했던 것도, 그리고 마침내 고래를 닮은 거대한 극장을 지은 것도, 모두가 어릴 때 겪은 엄마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녀가 고래에게 매료된 것은 단지 그 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언젠가 바닷가에서 물을 뿜는 푸른 고래를 만났을 때 그녀는 죽음을 이긴 영원한 생명의 이미지를 보았던 것이다.
거대한 신화처럼, 수많은 이야기가 얽히고 가지를 쳐 나가고 있는 <고래>는 무척이나 독창적이고 다채로우며 컬트적인 소설이다. 도저히 알 수 없는 언어를 통해 매혹적인 서사를 만들어내는 능력에 감탄이 끊이질 않는다. 설령 이런 류의 소설이 정서에 맞지 않는 독자라도 이것만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이 소설, 정말 특이하다. 고령화가족에 이어 고래까지 읽고나니 천명관 작가의 팬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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