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통신의 시대를 만나 한국의 판타지는 폭발적으로 성장했지만 대부분의 수준은 너무 낮아 도저히 문학의 영역으로 봐주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렀다. 이는 그 장르를 즐기는 매니아층에서 더 강하게 나와 스스로를 양산형 판타지라 부르며 비하하더니 오히려 그러하 B급 또한 자연스러운 하나의 장르에 이르게 되었다. 수준 이하의 글을 소비하는 계층이 등장해 버린 것이다. 그러더니 이제 조금씩 그들 스스로를 복제하기 시작했다. 어느정도의 고민이 필요한 문장은 베끼지 못하지만 어떤 요소가 독자들에게 흥미를 불러 일으키는지는 쉽게 배울 수 있으니... 그래서 대부분의 판타지 문학은 기연, 이계로의 이동, 먼치킨, 하렘으로 수렴되어 버린다.
이런 혼란 속에서도 나름 독창적인 작품들은 나오고 있었으니 '겨울성의 열쇠'도 그 중 하나다. 물론 여대생의 습작 수준의 문장은 투박하고 훈련받지 못한 글쓰기가 눈에 거슬리기는 한다. 허나, 이 모든 단점을 눌러버릴 만 한 압도적인게 있으니 바로 근성이다. 왠 근성? 이라 할 수 있겠지만 사실 이정도 분량의 글에서 오리지널 세계관을 가지고 글을 만들어 나간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어느것 하나 베낀 곳 없는 독창성은 수준과 무관하게 충분히 훌륭하다. 게다가 그 세계관이 매력적이기까지 하다면. 민소영이라는 예쁜 이름의 작가가 만든 세계는 태생과 결과물 모두 오리지널이 강하다. 현실적인 마법사와 기사의 전투능력, 주인공 보정 없는 스탯 밸런스가 특히나 마음에 든다.
가라. 브라달로스의 이빨, 휴로페의 핏방울, 달의 사생아여. 그 자가 사랑하는 아내의 뱃속에 스며들어, 그의 아이와 같이 자라거라. 그리고 보름마다 그의 죄를 일깨워라. 그의 피를 말려 버리고, 그의 정신을 으스뜨려 버리고, 그렇게 산 채로 죽여 버려라.
주인공 아킨토스는 부친의 원죄로 엘프의 저주를 받았다. 보름마다 늑대인간이 되는 그 저주는 어미를 자살하게 하고 아비로부터 외면받는 원인이 된다. 게다가 자신의 잘못이 아닌 부모의 죄를 이어받는다는 불공평함은 아킨토스를 차갑고 비뚤어지게 만들었다. 나름 작은 미래를 꿈꾸던 아킨토스지만 로메르드 왕가의 쿠데타에 휘말리면서 그 작은 꿈마저 엉망이 되어 버린다.
아킨토스는 우울함의 아우라에 휩싸여 있고 어떤 여주인공은 강간을 당하기까지 하는 등 어두움의 끝에 서 있지만서도 이 소설이 지금까지 사랑 받는 건 캐릭터들의 우울함이 책 속에서 끝나는게 아니라 독자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 아닐런지. 작게나마 앞으로 나아가고, 뜻하지 않게 좌절당하기를 반복하는 아킨토스의 모습은 한없이 답답하면서도 나도 모를 응원을 불러 일으킨다. 어느 순간, 작은 행복과 힘을 얻었을 때의 동화적인 해피엔딩은 평범하지만 강한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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