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수레의 책읽기

[변경] 회색을 위한 변명

슬슬살살 2019. 1. 28. 21:45

한 때 시대를 상징하는 지식인이었던 이문열은 한껏 기울어진 가치관과 한없이 높은 교만함으로 이제는 글 잘쓰는 꼰대 소설가로 전락했다. 적어도 현재 한국 문단에서 이문열 자체를 멘토로 삼거나 존경한다고 대놓고 밝히는 소설가는 없어 보이는 걸로 보아 적어도 스승으로는 실패한 듯 하다. <변경>은 이러한 의식의 발전과정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소설적인 재미는 물론이거니와 작가가 근 현대사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는지까지 볼 수 있다.


<변경>은 전후에 월북한 아버지를 둔 가족이 격는 일을 그리고 있다. 이들은 사회적 편견과 가는 속에서, 산업화의 한 구석에서 조금씩 꺼져간다. 끊임없이 도전하는 청년 명훈, 허영심과 천민 자본주의에 물드는 명희, 회색 지식인으로의 삶을 살아가는 인철을 통해 시대상과 역사인식 뿐 아니라 성장과 사랑까지도 담아내고 있다.


유년의 일들은 언제나 돌연스럽다. 실은 그 링리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까지에는 알게 모르게 조짐과 예비와 진행이라는 과정이 있었겠지만, 그 시절의 불완전한 의식은 언제나 그 완성된 형태나 결말만 돌연스러움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또 유년의 일들은 그 해석과 기억에도 그 시절의 단순성으로 왜곡된다. 세상이 모두 놀이터처럼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거기서 벌어진 모든 일들로 그 무렵에 특히 열중했던 놀이 또는 깊이 빠져 있던 관념과 연관되어 해석되고 기억될 뿐이다.


주인공들 중 막내인 인철은 이문열의 자화상이다. 작가 스스로가 빨갱이 가족으로 지탄을 받는 어린 시절을 보낸데다 가족을 버리고 이념에 귀의한 부친을 끝까지 용서하지 못했다. 그러한 어린 시절의 관념들이 작가의 보수성의 뿌리가 된 걸로 보인다. 때문에 <변경>의 등장인물들은 역사의 중심에 서지 못하고 회색인, 경계인으로서만 삶을 살아간다. 이들이 자신의 삶을 똑바로 바라보는 위치에 서는 것은 산업화로 인해 생계가 위협되고 나서이다. 그 전까지는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반쪽으로 살아갔다면 자본의 위협에 이르러서야 인식하고 깨어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그게 무어든 우리와는 상관 없어요. 그건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끼리 따져보라고 하세요.


아무리 작가의 개인사를 감안한다 해도 동시대 작가인 김승옥, 황석영이 바라보는 60년대에 비하면 얼마나 편협한지. <변경>의 등장인물들이 사회적으로 외로운 약자임에는 분명하나 그들은 염세적이고 양비론 적인 관점에서만 세상을 바라본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경계에서.

 

로마 시민이 되는 것 외에는 구제받을 길이 전혀 없는... 우리 민족에 대한 그 철저한 비관과 불신이 무섭다. 민중의 힘, 아니 인간의 진보 그 자체에 대한 네 불신은 차라리 증오라는 편이 옳겠다.


일종의 변경이론인데, 당시 한국을 아메리카 제국의 변경으로 바라보고 있는 교묘하게 포장된 신식민주의 이론이다. 이러한 변경에서 지식인은 어느것 하나 선택하지 못하고 그저 살아갈 뿐이라는 건데, 너무나도 나약한 사회 인식이다. 모두가 머리에 디를 두르고 세상을 향한 혁명을 부르짖을 필요는 없다만 적어도 당시 세상을 바꾸었던 변혁에 부채의식이라도 보여 줬다면 어땠을까.


무엇이든 자기 밖의 집단과 구조의 문제로만 해석하려 들던 70년대와 80년대를, 어떻게든 세상의 시비에 관여하지 않을 수 없는 말과 글의 사람으로 보내야 했던 인철이 그 같은 선택 때문에 받아야 했던 상처는 얼마나 끔찍했던가.


특히 진보적 시각을 가지지 않는 청년층에 대한 노골적인 비웃음을 보냈던 지식인들에 대한 반감은 글 곳곳에 숨기지 않고 있다. 내성적인 문학청년에게 보수와 진보, 혁신과 선동은 도저히 선택할 수 없는 가치관이었노라고 항변한다. 허나 존경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들 역시 또하나의 예비 반동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아쉽다. 모든 것이 사회탓은 아니지만 사회탓이 아닌 것도 없는 법인데 말이다.


그저 이문열의 자전 소설로만 인식한다면 재미있을 소설적 요소가 즐비하다. 명훈과 모니카의 미묘한 애정행각, 주먹세계에서의 명훈의 활약, 인철의 첫사랑, 이들의 가난과 역경은 하나하나가 드라마 하나씩은 나올 법한 에피소드이고 이문열의 살아숨쉬는 문장들은 이들이 글 속에서 끄집어 내어 우리의 형제, 아버지, 삼촌으로 보이게 한다. 결코 짧지 않은 소설 속에서 근현대사를 헤집고 오르다 보면 묵직한 것 하나가 가슴속에 맺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