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다루는 소설은 기록이 있기 때문에 사실관계의 큰 줄기는 유지하되 빈 공간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채운다. 대부분 우리는 결과를 알고 있기 때문에 주로 그들이 왜 그렇게 했는지를 작가의 상상을 통해 들여다본다. 그 상상에 따라 우리는 무릎을 치기도 하고 지루해 하기도 하는데 안타깝게도 람세스는 후자다.
그의 백성을 행복하게 해주는 자니라.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행복을 만들어내려 애쓰지 말 것이며, 신들과 끊임없이 창조하시는 우주의 원칙에 합당한 행동을 해야 한다. 하늘을 닮은 신전들을 짓고, 그 신전들을 그 신전의 주인이신 신께 바쳐라.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다보면, 부차적인 것은 저절로 조화를 이루는 법이니라.
크리스티앙 자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이집트의 이미지 대신 현대 사회에 가까운 법치국가 이집트를 소개한다. 심지어 람세스라 할지라도 자유인의 뒷조사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현대 사회다. 그리고 람세스 주변에 4명의 유능한 친구를 배치한다. 먼저 유능한 외교관인 아샤, 충실한 서기관 아메니, 뱀과 독에 능숙한 세타우, 마지막은 그 유명한 모세다. 그리고 람세스의 적은 주변국들과 왕의 형 세나르다. 온갖 정적, 외적들이 람세스를 노리는 절체 절명의 순간 순간들이지만 람세스는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이들을 강인하게 이겨낸다. 게다가 그 과정들을 스파이 소설처럼 흥미롭게 풀어내고 있어 독자를 흡입한다. 게다가 마지막에는 가장 친한 모세의 배신까지 이어지고 있어 서사의 구조만큼은 압도적이다.
그러나 람세스에는 가장 큰 문제가 있는데 문제의 해결 방식이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다는 거다. 정치적 음모를 해결하고, 전쟁에 참가하는 과정에서 신화적인 요소가 너무 많이 투입된다. 저주를 걸어 상대를 해하고, 신전을 지어 적의 공격을 방어한다. 특히나 신전은 왜 이렇게 많이 짓는지. 본격 신전 건설 소설이다. 우리가 역사를 소설로 변형하는 이유는 역사에 빈틈을 상상력으로 메워서 생동감 넘치는 과거를 만나고 싶음이다. 그런데 이렇게 신화적인 장면들로 빈틈이 채워진다면 이는 기존의 역사와 다를바가 없다.
물론, 분류하고 분석하는 것은 이성이 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성은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길을 끌어가는 것은 전격적인 직관이며, 파라오의 가슴에서 파라오의 가슴으로 전수되는 직접적 지식인 '시아'이다.
그 유명한 카데슈의 전투를 묘사한 장면은 당시 이집트가 남긴 신화적인 기록, 왕이 스스로 나아가 수천의 적을을 혼자 물리쳤다는 내용을 진실로 쓰고 있어서 도저히 이성적인 상상력이 아니다. 이건 신화다.
작가는 람세스를 신격화하고 고대 이집트를 아름답게 그려서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환상을 충족하고자 했던 듯 하다. 이를 위해 기독교를 이집트의 종교에서 분화되었다고 보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차용한다. 모세는 이집트의 수많은 신 중 '아톤'을 유일신으로 모시고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데리고 이집트를 탈출한다. 이 장면 또한 너무나 신화적으로 그려져 긴장감을 떨어트린다. 결론적으로 소설 <람세스>는 역사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기보다는 고대 이집트의 신비주의를 강조함으로서 '보다 올바른 세상'을 동양적인 묵상에서 찾는다.
'열수레의 책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인의 나라] 일기는 일기장에 (0) | 2019.03.21 |
---|---|
[오발탄] 꿈도 희망도 없는 (0) | 2019.03.16 |
[죽음의 중지] 사라마구의 또 다른 실험 (0) | 2019.02.05 |
[진실의 10미터 앞]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탐정 (0) | 2019.01.31 |
[첫아이 초등학교 보내기] 지푸라기는 지푸라기 (0) | 2019.0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