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수레의 책읽기

[죽음의 중지] 사라마구의 또 다른 실험

슬슬살살 2019. 2. 5. 17:59

조제 사라마구의 소설은 미치광이 과학자의 잔인한 실험실 같다. 그는 도저히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을 상정해 놓고 인류의 반응을 살피면서 즐거워한다. 아포칼립스 속에 배어 있는 그의 유머가 결코 블랙 조크의 한 갈래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다. 갑자기 인류 전체를 장님으로 만들어 혼돈으로 빠뜨리더니 이번에는 죽음을 '중지'시켰다. 지리적 개념에서의 특정 국가를 불사로 만들어 놓고는 그 변화를 관찰한다. 한 마디로 변태다.


일어날 수 있는 일은 모두 다 일어날 것이다, 시간이 문제일 뿐이다, 살아서 그것을 다 보지 못한다면, 우리가 오래 살지 못했기 때문일 뿐이다.


그럼에도 장르 소설과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다른 점은 확연하다. 단순히 가학적인 즐거움만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숨겨져 있는 여러 감정선, 인류의 무지, 텍스트 행간에 담긴 철학 등을 문학으로 드러낸다.

첼리스트는 수화기를 내려 놓고 피아노, 첼로, 책꽃이를 봄면서 큰 소리로 물었다, 도대체 이 여자가 나한테 원하는게 뭐야, 이 여자는 누구야, 왜 내 인생에 나타난거야.


그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죽음의 중지>도 독특한 화법을 쓰고 있는데 바로 대화의 단절이다. 다른 문장은 모두 간결하게 쓰고 있지만 유독 대화 만큼은 불친절하기 짝이 없게 한 문장 안에 어거지로 우겨 넣는다. 잘 보이지도 않는 쉼표와 마침표 덕분에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텍스트를 몇차례에 걸쳐 읽어야 하는 불편함이라니. 가학이 취미라면 정말 제대로 한방 먹인 셈이다.


이 소설에서는 어떤 국가 하나의 죽음을 중지시킨다. 중확히는 유예다. 일종의 사신 파업인 셈인데 이 것 하나로 사회는 혼란에 빠진다. 처음에는 기뻐하다가, 장례사는 직업을 잃고, 보험은 사라지며 인류는 점차 늙어가게 되면서 요양원은 적체된다. 젊은 이들의 부양 범위는 끔찍하게 넓어져만 가고 늙어 힘든 몸뚱아리는 도저히 죽어지지 않는다. 결국 이웃나라로 죽음 원정을 떠나는 행렬이 마피아 주도로 생겨 버렸다. 이것으로 한 가지만은 확실해졌다. 죽음이 인류의 적이 아니라 영생이 적이다.


그런 면에서 죽음을 여성으로 표현한 건 곱씹을 만 하다. 인류의 지속을 보장하는 건 탄생과 더불어 죽음이기 때문이다. 이 죽음이 죽는다면 인류는 어떻게 될까. 책의 마지막 죽음은 예술가와 함께 죽음을 맞이한다. 덧붙여진 '다음날 아무도 죽지 않았다'라는 문장은 그래서 끔찍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