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수레의 책읽기

[오발탄] 꿈도 희망도 없는

슬슬살살 2019. 3. 16. 13:06

수록작품: 일요일 / 학마을 사람들 / 사망보류 / 몸 전체로 / 갈매기 / 오발탄 / 자살당한 개 / 살모사 / 천당 간 사나이 / 청대문집 개 / 표구된 휴지 / 고장난 문 / 두메의 어벙이 / 미친 녀석


작년인가. 가난을 관광상품화 하는 문제에 대한 르포 기사를 읽었다. 정확히는 기억이 안나지만 쪽방 체험, 달동네 나들이 같은 상품들이 지자체 주도로 개발되고 있다는데에 대한 우려 섞인 기사였다. 영화, 문학에서 스토리의 시발점 역할을 하는데 재난만큼 확실한 건 없다. 종류와 규모는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로 평이한 삶에 갑작스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외부충격을 재난이라 본다. 보통은 전쟁, 교통사고, 천재지변을 떠올리겠지만 이범선은 '가난'을 재난으로 봤다.


생전 발표한 작품 수에 비하면 미비하지만 고르고 고른 14편의 단편은 대부분 가난과 무기력한 지식인을 다루고 있다. 물론 해방과 한국전쟁을 지나는 대한민국이란 건 지금의 아프가니스탄보다 못한 상황이지만 그 와중에도 희망과 열정을 노래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허무주의에 빠진 인간도 있다. 이범선 작가는 허무주의쪽에 가깝다. 모든걸 체념하고 세상에 맡겨버린 상황이다.


사흘만에나 놓여났다. 분했다. 그러나 그 분보다 식구들 걱정이 더 앞섰다. 아내는 사흘 전 고 자리에 고대로 앉아 있었다. 세 살짜리는 등에 업고 일곱 살짜리는 담요에 싸안고. 그를 보자 아내는 그대로 폭삭 쓰러졌다. 울지도 못했다. ('몸 전체로' 中)


이범선이 바라본 세상은 끔찍하다. 가난은 이범선이 인식하고 있는 모든 세계를 둘러싸고 있으며 그 어디로도 도망갈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그 가난에, 그 고통은 읽는 내내 독자에게 전이된다. 그야말로 꿈도 희망도 없는 세계를, 이범선은 그리고 있다.

어쩌다 오발탄 같은 손님이 걸렸어. 자기 갈 곳도 모르게....."아들 구실, 남편 구실, 애비 구실, 형 구싱, 오빠구실. 또 계리사 사무실 서기 구실. 해야 할 구실이 너무 많구나. 그래 난 네 말대로 아마도 조물주의 오발탄인지도 모른다. 정말 갈 곳을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지금 나는 어디건 가긴 가야 한다. ('오발탄' 中)


그 가난과 고통 속에서 자신을 일종의 오발탄으로 바라본다. 쏘아지긴 했으되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는. 그가 보여주는 대안 없는 가난 속에서 우리는 '지금의 나는 얼마나 다행인가'라는 일차원적인 인식과 가난이 끝났음에도 없어지지 않는 사회의 부조리함을 동시에 느끼면서 스스로가 또하나의 오발탄이 아닌지 곰씹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