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수레의 책읽기

[역사의 역사] 사실과 문학의 중간에서

슬슬살살 2019. 5. 2. 21:59

우리는 역사는 진실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조금 책을 읽은 이라면 역사가 승자들의 기록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실제로도 그러하다. 유시민은 여기서 더 나아가 역사가 어떤 이들이, 어떤 관점으로 기록하는지를 살펴본다. 이 과정이 왜 중요한냐면 역사=진실이라는 보편타당한 논제에 대해 스스로가 인식함으로서 보다 객관적이고 능동적인 역사 인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재기발랄하고 날카로운 평소 유시민의 재담을 기대했다면 이 책은 덮는 것이 좋다. 이 책은 그야말로 논리적 사유를 통해 우리가 믿고 있는 역사가 어떤 방식으로 생성되는지를 분석적인 문체로 써내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어떠한 가벼운 농담이나, 상쾌함을 부르는 정치적 풍자따위는 들어있지 않다.


인간은 다른 인간가 개별적·집단적 관계를 맺고 공동체를 형성하며 살아가는 동안 서로 협력하고 경쟁한다. 그래서 인류 역사는 개인과 집단의 성취, 협력, 갈등, 대립, 투쟁, 억압, 착취, 정복전쟁과 크고 작은 살육행위로 점철되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일을 객관적이고 공평한 관점으로 서술할 수 있는 역사가가 있을까? 더 근본적으로 객관적이고 공평한 관점이 존재할 수는 있는가? 없다.


기본적으로 역사는 객관적일 수 없다. 모든 역사는 기록이며, 기록이라는 것 자체가 권력자와 지식인의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기록에는 기록자의 관점이 존재한다. 사람이 하는 이상 그 역사에는 객관성이 결여된다. 반대로 역사에 객관성이 부여된다면 어떨까. 이른바 알파고 같은 AI를 통해 모든 역사를 기록할 수 있지 않을까? 안타깝지만 아니다. 이론적으로 모든 사실, 현상을 기록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분석하고 중요도에 따라 분류하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미 AI가 분류를 한다면, 그건 AI나 그 프로그램 설계자의 '관점'이 투영되기 때문이다. 그냥 기록된 사실이란건 역사가 아니다. 그건 CCTV다. 유시민은 이를 '생명력 없는 역사'라 부른다.


역사란 무엇인가? 인류 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으로 발전하고 공간으로 확대되는 마음의 활동 상태의 기록이다.
따라서 역사는 역사가의 관점에 따라 기록되어진다. 재밌는 사실은 그 역사가의 관점이라는 것이 시간적 흐름에 따라 변해간다는 것이다. 시대에 따라 어떤 역사는 진리에서 거짓으로, 선에서 악으로 변화한다. 우리는 그러한 관점까지도 살펴봄으로서 진실을 가려내는 힘을 기를 수 있다.


유시민은 이 책을 통해 시대별로 달라지는 역사관의 흐름을 정리했다. 그야말로 역사의 역사다. 어떤 시대에는 있었던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 미덕인 시대가 있었고 중국에서는 역사를 색인별로 분류하는 기전체가 발달하기도 했다. 사료의 공백과 그 사이를 채워 넣는 문학적 상상력이 중요한 시대도 있덨다. 세월이 흐르면서 문학적 상상력의 범위는 줄었으나 그 질은 여전히 같다. 이븐 할둔에 이르르면 드디어 과학적 분석방식이 역사에 접목된다. 후에, 마르크스는 보편적 역사법칙을 '발명'해내는데까지 이른다. 에드워드 카, 토인비, 헌팅턴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촘촘하게 채워넣은 역사가들의 연구방식은 우리가 편하게 진실로 받아들이던 역사 뒤편에 숨겨진 행간을 꿰뚫어 볼 수 있게 한다.

크로체는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고 선언했다. 역사란 본질적으로 현재의 눈으로 현재의 문제에 비추어 과거를 바라보는 것이며, 역사가의 임무는 기록이 아니라 평가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만약 아무것도 평가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기록할 가치가 있는 사실인지 역사가는 도대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역사는 객관적 정보를 바탕으로 써내려간 하나의 르뽀다. 기록할 가치의 판단을 통해 우리는 역사를 살아 숨쉬는 소설처럼 받아들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