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듣기만 하고 가사를 맞추는 요즘 예능에서, 불과 15~20년 전 노래를 들려주면 게스트들은 가사에 충격을 받는다. 그 당시에는 삼각관계, 친구의 남자, 바람났다 다시 돌아오는 남자 같은 소재들이 아무렇지 않게 쓰여졌었다. '쿨'함과 수평적 관계가 기본이 되는 요즘의 정서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울 테다. 물론 그때라고 지금보다 성적으로 문란하거나 했던건 당연히 아니지만.
"플레이보이는 아무나 되는 줄 아세요? 플레이보이가 되려면 첫째 돈이 많아야 해요. 당신이 돈이 많은가요? 둘째로 키가 커야 하는데 키가 큰가요? 셋째 여자에게 선심을 잘 써야 하는데 째째하기가 이를 데 없죠. 그 다음은 사람이 멋있어야 하는데 멋하고는 담을 쌓은 사람이죠. 무엇으로보나 플레이보이가 될 수 있는 조건을 하나도 구비하지 못한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에는."
한창 경제가 성장하던 80년대, 한국의 부자들은 양주와 호텔, 어설픈 서양 문화들을 받아들인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가정부, 가정교사 같은 것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소재로 쓰여지던 시대인 것이다. 세화의 성은 여러 상류 계층들이 서로 연결되어 불륜과 내연, 배신과 복수가 이어지는 소설이다. 극으로 따지자면 베스트극장의 불륜 버전쯤 되겠다. 실제로 베스트극장으로 만들어진 적도 있고.
이왕이면 철저한 패륜이 기분 좋다는 왜곡된 심리는 자기만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일종의 보상적 쾌감인지도 모른다. 남의원에게도 그녀는 유감이 있는 것이다.
중산층의 딸인 세화가 야망에 불타는 지범호에게 버림받고 국회의원 남풍훈의 부인이 된다. 야망남 지범호는 세력가의 딸인 유란과 결혼하지만 세화를 잊지 못하고 불륜 관계를 이어간다. 세화 역시 남풍훈의 옛 여인으로 인해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지는 못한다. 결국 고통스러워하던 세화가 자살하고 지범호 역시 세화의 동생에게 복수를 받는다.
그리고도 다시 돌쳐선 어리석음. 더러운 것이 정이라고. 또 유행가 가사 나부랑이가 되고 마는구나. 사실이 그런걸. 인생이 그렇잖아. 인생은 결코 유연한 첼로의 현이 아냐. 배반, 아픔, 쓰디쓴 고배. 나를 찾아야 한다. 그렇다고 퇴폐한 유행가로 전락해서는 안된다. 음악은 나를 현실에 대해 청맹과니를 만들었는지 몰라. 현실은 결코 음악이 아냐.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유치한 여성 독립주의지만 오히려 그 시대의 여성관, 결혼관 등을 엿볼 수 있어 꽤 술술 읽힌다. 80년대만 하더라도 여자 팔자는 남자에 따라 간다는 사고방식이 너무나 당연했던 시대다.
'열수레의 책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계단편문학선] 인생은 단편소설을 닮는다 (0) | 2019.11.04 |
---|---|
[오프 더 레코드 현대미술] 에피소드를 알고 보면 더 많이 보인다. (0) | 2019.10.19 |
[종의 기원] 괴물은 태어나는가, 만들어지는가 (0) | 2019.09.28 |
[정유정, 이야기를 이야기하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팔리는 작가의 글쓰는 방법 (0) | 2019.09.23 |
[선택] 원하는 것이 아닌 필요한 것을 선택하기 (0) | 2019.09.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