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으로 유명한 일본의 문학들은 거의 대부분이 허무주의의 경향을 띠고 있는것 같다. <모래의 여자>역시 마찬가지. 얼핏 공포물에 가까운 소설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삶에 대한 지독한 지겨움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모래와 물은 상극의 환경이면서 인간에게 극한의 고통을 주는 자연 환경이다. 사막은 말할 것도 없고 망망 대해에 고립된 배의 이야기를 우리는 무척이나 많이 접해 왔다. 환경 그 자체도 무섭지만 진짜 두려운 것은 그 이면에 숨어 있는 생명체다. 모래괴물이라던지, 상어라던지. 이 책의 경우에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인간이다.
아무래도 일손이 부족한 곳이니까요...... 부자든 가난뱅이든, 일을 할 만한 사람은 모두 부락을 떠나고 있어요..... 모래밖에 없는 가난한 마을이니까....
곤충 채집을 취미로 하는 평범한 소시민 남자(이름이 두어번 거론되지만 기억에 나지 않는다. 그리 중요하지도 않고)가 모래로 이루어진 마을에 갇혀서 무의미한 노동을 계속해 나간다는 얘기다. 이 남자는 곤충 채집을 떠났다고 모래로 이루어진 마을에서 하룻밤 묶게 된다. 이 마을은 가난할 뿐 아니라 무척이나 기이한 형태를 띠고 있는데 넓은 모래구멍 아래 집들이 있는 형태다. 특히 모래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은 최전선에는 가장 가난한 집들이 띄엄띄엄 배치되어서 매일매일 무너져 내리는 모래를 퍼내고 있다. 집이 잠기지 않도록. 잠깐, 무언가 이상하다. 매일 죽지 않기 위해 모래를 퍼낸다면 도망을 가는게 낫지 않나? 그렇다. 이들은 최전선의 노예들인 것이다. 후방에 있는 조금 생활이 나은 이들을 위해 죽어라 노동을 해야 하는 숙명의 노예. 심지어 그 노동은 가치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노동.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시지프가 영원히 흘러내리는 바위를 굴려올리는 것과 비슷하다.
아주 오래전에 일가족이 야반도주를 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한동안 집이 비어 있어서,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는데...... 정말, 위험해요...... 어디 한 군데만 무너져도 그 다음은 금이 간 제방이나 다름 없으니까......
남자는 어느 여자가 혼자 살고 있는 집에 갇혀 모래를 퍼내는 노역을 하게 된다. 그냥 노역을 시키는 게 아니라 식사와 담배, 술 등을 제공하고 부업거리를 원하면 가져다 주기도 한다. 세상에 이 지옥에서. 웃기는 것은 이 집의 원래 주인인 여자다. 그저 매일 모래를 퍼나를 뿐이고 남자가 때리거나 욕을 해도 그럴수 밖에 할 뿐이다. 탈출을 해도 별거 없다면서 강제 노역에 순응하는 이 여자는 이 부업거리로 라디오를 사는게 유일한 꿈인 여자다. 당연히 함께 도망치자는 남자에게 전혀 동조하지 않는다. 집의 환경은 지옥이어서 밥을 먹어도 모래가 가득 들어가 있고 잘 때도 모래가 서글서글하다. 목욕은 꿈도 꾸지 못하고.
남자는 탈주를 꿈꾸고 수차례 노력한다. 실제로 성공하고 다시 붙잡히는 과정은 한 편의 장르소설을 보는 것처럼 흥미진진하다. 재미있는 것은 천연덕스러운 마을 사람들이다. 노동을 거부하는 남자에게 폭력을 휘두르지 않고 욕설도 하지 않는다. 그저 순진한 척 안하면 할 수 없지 뭐, 그냥 계속 거기 갇혀 계시게.. 하는 느낌의 이 촌부들은 그 어떤 공포물의 빌런보다도 잔인하다. 이 경우 목마름과 굶주림에 사흘도 못가 항복하게 된다. 그러면서 원하면 왠만한건 구해다 준다. 술이니 담배니 하는 정도에서.. 그러니 완전한 노예도 아닌 셈이다. 남자는 한차례 탈주에 성공하기도 하지만 이내 되잡혀 온다. 그러면서 기회를 노려 보지만 세월은 흐르고.. 어느새 모래를 퍼내는 삶에 적응해서는 여자와 함께 부업을 하고 라디오를 사게 된다. 여자가 임신해서 병원에 가게 됐을 때 남겨진 사다리로 탈출을 할 수도 있었지만 이내 남자는 포기한다. 여자를 사랑해서라기 보다는 어릴적부터 나무둥걸에 묶인 코끼리처럼, 철저하게 체제에 순응하게 된 것이다. 노동을 하고 월급을 받아 생활하는 삶과 모래를 퍼올리는 삶이 다를바가 없기에..
모래로 양분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던 이 세상과 모래구멍 속 세계는 실은 한 공간의 서로 다른 모습이며, 인간은 다른 세계를 꿈꾸느라 바로 여기가 다른 세계임을 자각하지 못하는 절대적 모순을 사는, 그리하여 늘 몸부림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 김난주의 '옮긴 이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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