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수레의 책읽기

[김유정 전집] 해학의 가면 뒤에 숨은 허무주의자

슬슬살살 2020. 2. 6. 22:08

1부 소설
산골나그내 / 총각과 맹꽁이 / 소낙비 / 노다지 / 金따는 콩밧 / 금 / 떡 / 만무방 / 산골 / 솟 / 봄ㆍ봄 / 안해 / 심청 /

봄과 따라지 / 가을 / 두꺼비 / 봄밤 / 이런音樂會 / 동백꽃 / 夜 / 옥토끼 / 生의 伴侶 / 貞操 / 슬픈이야기 / 따라지
땡볕 / 연기 / 정분 / 두포전 / 兄 / 애기 /

2부 수필
닙히푸르러 가시든님이 / 朝鮮의 집시 / 나와 귀뚜람이 / 預月의 산골작이 / 어떠한 부인을 마지할까 /

電車가 喜劇을 낳어 / 길 / 幸福을 등진 情熱 / 밤이 조금만 짤럿드면 / 江原道 女性 / 病床迎春記 / 네가 봄이런가

3부 편지ㆍ일기
姜鷺鄕前 / 朴泰遠前 / 文壇에 올리는 말슴 / 病床의 생각 / 필승前 / 일기

4부 설문ㆍ좌담ㆍ기타
설문 / 좌담 / 기타

5부 번역 소설
귀여운少女 / 잃어진寶石



어느 정도의 교육을 받았다면 내용은 몰라도 <봄봄>과 김유정이라는 이름은 들어보았을터다. 김유정의 봄봄, 줄기차게 외우지 않았던가. 그러면 김유정의 다른 작품을 알고 있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 생각보다 많지 않을것이다. 거기에 더해 전집, 그것도 원작 그대로의 작품을 읽은 사람은 손에 꼽을 듯 하다. 그중 한명이 되었다는데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

 

그 귀한 음식을 돌르도록 쳐먹고는 애비 한 쪽 갓다줄 생각을 못한 딸이 지극히 미웠다. 고년 고래싸 웬떡을 배가 터지도록 쳐먹는담 하고 입을 삐쭉대는 그 낮짝에 시기와 증오가 력력히 나타난다. 사실로 말하자면 이런 경우에는 저도 반듯이 옥이와 같이 햇스련만 아니 놈은 꿀바른 주왁을 다먹고도 또 막걸리를 준다면 물다 뺏는 한이 잇드라도 어쨌든 덥석 물엇스리라 생각하고는 나는 그 얼굴을 다시 한 번 쳐다 보았다.

 

구루루 주는 밥이나 얻어먹고 몸성히 있다가 연해 자식이나 쏟아라. 뭐 많이도 말고 굴때같은 아들로만 한 열다섯이면 족하지. 가만 있자. 한 놈이 일년에 벼 열섬씩만 번다면 열다썸이니까 일백오십썸. 한섬에 더도 말고 십원 한장식만 받는다면 죄다 일천 오백원이지. 일천 오백원. 사실 일천오백원이면 어이구 이건 참 너무 많구나. 그런줄 몰랐더니 이년이 배속에 일천 오백원을 지니고 있으니까 아무렇게 따저도 나보담은 났지 않은가.

 

김유정은 우리 옛 모습과 생활을 풍자를 곁들여 해학스럽게 표현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반면 일말의 시대정신을 찾아 볼 수 없어 작가로서 불합격이라는 평도 받고 있다. 일제시대의 아픔 한 가운데 존재하면서 어찌 이리도 현실에서 눈을 돌리는지.. 꼭 저항만이 답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지만, 가장 친했던 이상과 비교해 보더라도 격이 너무 떨어진다. 그러나 민중의 가난과 무지렁이들의 슬픔은 작품 속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오발탄>처럼 처절한 수준은 아니지만 곳곳에 숨겨진 해학적 코드와 그 뒤에 숨은 깊이 있는 민중의 고통을 느낄 수 있다.

 

"아이야 우리 솥이 아니라니깐 그러네"


<정분>이라는 단편에서 은식이가 솥을 들병이에게 팔아 오입질 하는 장면을 들킨 은식이가 한다는 변명이다. 그 와중에도 체면을 챙기는 은식이가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솥 하나가 집안의 큰 재산인 당시의 생활상을 떠올릴 수 있고 그 하나남은 세간 마저도 여자에게 탕진하고야 마는 무식한 사내에게 안타까움도 느낀다. 정말이지, 내일이 없는 삶을 사는 중인거다.

 

이놈의 것도 밧이라고 도지를 받아쳐먹나.. 이제는 죽어도 너와는 품아시 안한다. 고 한 친구가 열을 내드니 씻갑으로 골치기나 하자고 도루 줘버려라, 이나마 업스면 먹을게 잇서야지.. 덕만이는 불안 스럽다.

 

게다가 이 전집은 일체의 가공 없이 원고 그대로를 싣고 있다. 지금은 어색한 당시의 맞춤법으로 책을 읽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 대신 뺑손으로 쓰여진 문장을 읽고 뺑소니를 떠올리는 일련의 과정에서 자연스레 소리를 내게 되고 잊었던 읽는 즐거움을 준다.

 

한창 낙엽이 질때이면 추수는 대개 끝이 난다. 그리고 궁하든 농촌에도 방방곡곡이 두둑한 멋섬이 늘려노힌다. 들병이는 이때부터 자연적 활동을 시작한다. 마치 그것은 볏섬을 습격하는 참새들의 행동과 동일시하야도 조타. 다만 한가지 차이라면 참새는 당장의 충복이 목적이로되 그들은 식사 이외에 그 담해 여름의 생활까지 지탱해나갈 연명자료가 필요하다. 왜냐면 농가의 봄, 여름이란 가장 궁할 때이고 따라 들뼝이들의 큰 공황기다. 이리하여 가을에 그들은 결사적으로 영업을 개시한다.


김유정은 여자에 미쳐 있었다. 실제로 훤씬 연상의 기생에게 푹 빠져 스토커 생활을 했다는 건 잘 알려져 있는데 그래서인지 곳곳에 묻어있는 연상 여성, 들병이와 같은 화류계 여인에 대한 변태적인 집착이 여기저기서 드러난다. 특히 야물딱진 연상녀(대부분은 정조관념 없는 기생)가 반푼이 남자를 구박하는 장면들은 다수의 작품에서 메타포처럼 반복된다.


몸이 아프면 아플수록 나느니 어머니의 생각. 하나 업기를 다행이다. 그는 당신이 나아노은 자식이 이토록 못생기게스리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편히 잠드셨나. 만일에 나의 이 꼴을 보신다면 응당 그는 슬프려니, 하면 엽기를 불행중 다행이다. 한숨을 휘 돌리고 눈에 고엿든 눈물을 씻을 때에는 기침에 욕을 볼대로 다 본 뒤였다.


5부로 이루어진 이 전집 후반부에는 김유정이 생전에 남긴 편지들이 남아 있는데 폐병으로 고생할 때라 계속해서 아프고 고통스러움을 호소하는 일들이 대부분이다. 그 뿐 아니라 추리소설의 번역본까지 실려 있으니 그야말로 김유정의 방대한 '백서'다. <전집>을 읽고 나니 김유정은 글빨은 있으되 해학의 가면 뒤에 숨은 허무주의자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