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는 오래 전부터 우리 세계의 양면성을 고민해 왔다. 선과 악의 이분법적인 모습이 아니라 분명히 존재하고 있지만 인간의 인식에 비치지 않는 세계다. 예를 들면 잠들고 난 후 라던가, 거울 속의 세계라던가. 그러한 세계관은 훨씬 뒤에 <1Q84>에서 본격적으로 그려진다. <어둠의 저편>은 그 10여년 전에 쓰여졌다. <1Q84>가 평행우주에 가까운 다른 세계를 배경으로 한다면 <어둠의 저편>은 고작 밤, 그것도 오후 11시와 오전 7시 사이의 반나절을 다룬다. 짧은 시간이지만 잠을 자지 않고 보낸다면 긴 시간이 될 수도 있겠다.
"한밤에는 그 나름대로의 규칙과 시간의 흐름이 있는거야, 그런 흐름에 역류하려고 해봤자 별 도리가 있겠나."
<어둠의 저편>에서의 시간은 조금 다르게 흘러간다. 이 시간동안 잃어나는 사건은 3개 정도. 먼저 중국인 매춘부가 폭행을 당하는 사건, 마리와 다카하시가 가까워지는 사건, 마지막으로 마리의 언니인 에리가 저쪽 세계로 건너갔다 오는 사건이 있다. 첫 번째의 사건이 일반적인 소설에서의 사건이라면 두 번째는 결과다. 세번째의 사건이 독특한데, 아사이 마리의 언니인 에리가 침대에서 자고 있고 의식하지 못한 채 TV 속으로 들어갔다 나오게 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한 차례 TV 속에서 깨지만 돌아가는 방법을 찾지 못하고 결국 동생의 부름을 듣고 빠져 나온다. 거기에 더해 아사이 에리는 3개월째 잠에 빠진 상태. 앞 선 두 사건에 비해 기괴하지만 상징적인 비유가 녹아 있다.
그들과 나라고 하는 두 세계를 갈라놓고 있는 벽이란 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혹시 그런 벽이 있다 해도, 종이를 겹겹이 붙여 만든, 허술한 '하리포데'(종이를 거푸집에 발라서 만든 소품)라고나 할까, 그런 얇은 벽인지도 모른다. 몸을 슬쩍 기대는 순간 뚫려나가서, 벽의 반대편으로 쓰러져버릴지 모를 그런 벽이라고 할까. 우리 자신의 내부에 '저쪽 세계'가 이미 몰래 숨어 들어와 있는데도, 그런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뿐인지도 모른다.
TV를 매개체로 하고 갈라진 두 세계는 일종의 인간의 양면성을 의미한다. 바깥 세상에서 우리는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밤이 되면 어두운 면이 튀어 나오는데 중국인 여성을 폭행하는 변태적인 성향을 보이는 것도, 아리따운 소녀를 관음하는 모습도 대부분 밤에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리고 밤과 낮은 매일 매일 반복된다. 결국 인간은 어두운 면을 품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 다행인 건 어둠의 저편에는 다시 새벽이 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인간은 어두운 시간 대부분을 잠으로 보내고 일부만이(중국인 매춘부를 폭행한 시라가와 처럼) 밤의 생활을 보낸다. 대부분은 어두움을 내면에 감추고 드러내지 않을 이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예외적인 경우라도 하루 정도라면 인간은 버틸 수 있다. <어둠의 저편>은 인간이 어둠을 끌어 안고 살아야 하는 존재임과 동시에 반드시 새벽을 맞이 한다는 희망 메세지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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