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수레의 책읽기

[문명의 배꼽, 그리스] 카잔차키스와 함께하는 그리스 여행

슬슬살살 2020. 3. 22. 11:23

의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문과의 감성을 가지고 있는 시골의사, 박경철. 그가 어린 시절 가슴에 품었던 꿈은, 그리스 여행이었다. 오십을 앞두고 그 꿈을 실현시킨 박경철 작가는 우리에게 그 결과를 풀어 놓는다. 단순한 그리스 여행기가 아니라 긴 시간동안 만나보고 싶었던 것 하나 하나를 마주할 때의 감동을 공유한다. 

어떤 여행자가 어떤 길을 선택하든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들고나는 데 코린토스를 거치지 않을 재간은 없다. 그런 점에서 코린토스는 그리스 여행의 오프닝 무대인 셈이다. 바위투성이인 고대 코린토스의 땅은 번영의 땅이었지만, 운명의 신 모이라의 실타래는 늘 공정하다. 코린토스의 땅은 번영의 땅인 동시에 약탈의 땅이기도 했고, 탐욕의 땅인 동시에 몰락의 운명을 품은 땅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코린토스는 진정 고대 그리스의 '소돔과 고모라'였으며, 스스로 덫에 걸려 몰락해버린 인간의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땅이기도 했다. 

 


열 권의 계획을 가지고 1권, 펠레폰네소스 편을 달고 2013년에 출간되었지만 아직가지 2권의 소식이 없는 걸로 봐서는 뭔가 문제가 생긴 듯 하긴 하다. 어쨌거나 이 책은 그리스 여행의 오프닝, 펠레폰네소스 반도의 이야기다. 여기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스파르타가 있는 반도로, 아테네와 뜨거운 전쟁을 벌이던 이들의 이야기다. 작가는 자기가 꿈꿔왔던 곳들을 방문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카잔차키스의 작품을 인용함으로서 마치 이 위대한 작가가 본인의 여행에 동행하는 것처럼 그려내고 있다. 손발이 오그라들기는 하지만 여행기의 본연의 목적인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데 있어서는 탁월한 선택이다. 넘쳐나는 여행기 대부분이 자신을 찾는다, 라는 일차원적인 감정에 급급하지만, 박경철 작가는 역사, 인문을 포함해 신화적 해석에 이르기까지 폭 넓은 감정을 보여준다. 

올림피아 박물관은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늪이다. 영국 박물관, 루브르 박물관, 아테네 고고학 박물관 등 쟁쟁한 명성을 가진 어떤 박물관도 이곳만큼 발길을 붙들지는 못한다.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뷔페를 차려놓고 채울 수 있는 한 배를 채우라며 오만한 표정을 짓는 그곳들에 비하자면 이곳은 어수리, 노리대, 바디취, 곤드레로 차린 소박한고 고졸한 산골 노부부의 상차림에 가깝다. 


여행지로서의 모습 대신 사람이 살아가고 있는 곳으로서의 그리스를 보여주면서도 과거의 영화, 신화를 놓치지 않는다. 책의 제목이 문명의 배꼽인데 이는 문명의 탄생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연결점이라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최근 읽고 있는 유시민의 유럽도시기행과 유사한 면이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박경철 편이 훨씬 낫다. 지루한 설명보다는 감성이라는 측면을 더 다루고 있다. 원래 여행기라는 건 이런 것 아닐까? 그리스에 가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