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수레의 책읽기

[사랑할 때와 죽을 때] 그토록 짧았으면서도 한 편으로는 너무도 길었던 휴가

슬슬살살 2020. 3. 26. 22:01

<서부전선 이상 없다>가 워낙 유명해서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 못지 않게 전쟁의 참혹함을 그리고 있다. 실제로 독일의 패전을 겪어낸 레마르크가 그려낸 전쟁과 그 속의 인간은 너무 사실적이어서 잔인하다. <서부전선 이상 없다>와 마찬가지로 전쟁의 허무함과 무의미한 희생을 다루지만 보다 처연하다. 아마도 그 속에서 피어난 사랑을 다루면서 일말의 희망을 주고, 다시 빼앗아가기 때문이라 생각이 든다. 

승리하고 있는 동안은 만사가 질서정연한 것 같이 생각되었다. 그렇지 않은 것은 무관심하지 않으면 위대한 목적 때문이라고 변명했다. 위대한 목적. 거기에는 언제나 양면이 숨어있다. 그 중의 한 면은 처음부터 음산하고 비인간적인 것이 아닐까? 나는 정말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을가? 사실은 모든 것을 의심하고 구토증을 느끼면서도 애써 뿌리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영화 '사랑할 때와 죽을 때'의 포스터


주인공 그래버는 입대 3년차의 독일의 병사다. 처음에는 승승장구했지만 이제는 후퇴를 거듭하는 중이지만, 히틀러와 나찌는 결코 지고 있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체제 선전을 위해 부여된 15일의 휴가에서 엘리자베스를 만난다. 가족들이 모두 사라져 버린 고향에서의 만남은 짧고도 정열적이다. 그럼에도 현실에 발을 딛고 있어 전쟁의 불안함과 공포는 가시지 않는다. 여기에 엉망이 되어버린 시민들의 삶에 그래버는 의문을 가진다.  


"저는 과거 10년 동안의 죄악에 내가 어디까지 관계되어 있는가를 알고 싶습니다." 
죄악이란 건, 전쟁 말인가? 
"전쟁을 일으킨 온갖 것들입니다. 거짓과 압제, 불법과 폭력입니다. 그리고 전쟁과 전쟁을 하는 방법입니다. 노예 수용소, 강제 수용서, 비전투원의 대량학살을 자행한"


자신은 과연 신 앞에서 용서를 받을 수 있을것인가. 비록 어쩔 수 없다고는 하지만 수십만씩 죽고 죽이는 이 전쟁에서 나의 책임은 어디까지인가. 


일제히 사격을 가하는 요란한 소리가 창동 속으로 퍼져갔다. 돌담 위에 앉아 있던 새들도 도망가지 않고 요란스럽게 지저귀고 있었다. 새들은 이미 총성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새들마저 적응해버린 포탄 속에서 인간은 너무나 쉽게 삶을 포기한다. 삶에 대한 희망이 없는 인간군상을 보는 일은 슬프면서도 무기력하다. 소설의 대부분을 굶주리고, 포탄을 피하고 폐허를 뒤지는데 사용하면서 전쟁의 고통을 잘 그려냈다. 그 안에서 엘리자베스와 나눈 사랑은 모든 고통을 뛰어넘는 인류의 보편적인 의지를 보여준다. 먹고, 자고, 사랑하는 일만 하기에도 모자란 20대의 청춘. 전쟁은 한사람이 일으키지만 고통은 전 인류가 짊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