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논객, 유시민이 한국인이 가장 가보고 싶은 유럽 4개 도시를 다녀왔다. 유럽여행기를 계속해서 내기로 계약이 되어 있다고 하니 앞으로도 계속할 모양이다. 프로젝트의 첫 번재는 아테네와 로마, 이스탄불과 파리다. 작가는 이 네 개 도시를 한마디로 이렇게 설명한다. 아테네는 멋있게 나이들지 못한 미소년, 로마는 뜻밖의 발견을 허락하는 도시로, 터키의 수도로 잘못 알고 있는 이스탄불은 단색에 가려진 무지개 같고(터키의 수도는 안카라다.) 파리는 인류 문명의 최전선이라고.
우연찮게도 얼마전 박경철의 <문명의 배꼽, 그리스>라는 기행기를 읽은 터라 두 작가의 여행 스타일을 비교해보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둘의 가장 큰 차이는 인식 방법의 차이다. 박경철 작가가 감성적인 소년같은 여행을 한다면 유시민 작가는 역시나 철저하게 유물론의 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본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좋아하는 지적인 작가, 유시민이 이 안경을 벗고 평범한 어른으로 여행을 하는 모습은 참으로 지루한데, 이 여행기에는 이 평범한 모습들이 너무 많이 수록되어 있다. 맛집을 찾아다니고 관광지를 둘러보는 유시민 작가의 모습은 솔직히 너무 매력이 없다. 대부분의 독자는 설명이 아닌 통찰을 기대할텐데, 본인의 전문분야가 아닌 곳에서는 한없이 약해지는 작가다. 여행보다는 거기에 얽힌 이야기, 특히 시민과 역사에 관한 에피소드를 풀어놓을 때면 갑자기 반짝반짝해진다. 예를 들면 그리스 식당과 음식의 얘기들은 여행 블로거보다도 못하지만 소크라테스와 민주주의에 대해 말할 때면 문체가 달라진다.
콜로세오는 로마 정치체제 변화의 결과이며 상징이었다. 공화정 시대에 시민들은 포로 로마노에서 정치인들의 격정적인 연설을 들으며 자신을 대표할 공직자를 선출하고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는 민회에 참여했다. 그러나 제정 시대에는 모든 것을 황제와 소수의 권력자에게 맡겨둔 채, 콜로세오의 잔혹한 검투를 보며 미친 듯이 소리지르다가 패배한 검투사에게 자비를 베풀 것인지 여부를 두고 엄지손가락을 올리거나 내리는 관객으로 살았다. 정치체제의 변화가 시민들의 일상생활을 근본적으로 달라지게 한 것이다.
민주주의의 탄생지인 그리스와 로마를 얘기할 때가 우리가 기대하던 작가 유시민에 가장 가깝다. 콜로세오를 바라보며 공화정의 위대함을 찾아내는 일이야말로 대한민국의 일번 공화주의자가 가장 잘하는 일일 터이다.
로마는 전성기를 다 보내고 은퇴한 사업가를 닮았다. 대단히 현명하거나 학식 있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뛰어난 수완으로 돈과 명성을 얻었고, 나름 인생의 맛과 멋도 알았던 그는 빛바랜 명품 정장을 입고 다닌다. 누구 앞에서든 비굴하게 행동하지 않으며 돈지갑이 얄팍해도 기죽지 않는다. 인생은 덧없이 짧으며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 때 거두었던 세속적 성공에 대한 긍지를 버리지는 않는다. 로마는 그런 도시인 것 같았다.
유시민이 바라본 로마는 쇠퇴했지만 긍지를 잃지 않는 모습이다. 최근 코로나로 인해 이탈리아의 민낯이 보여지고 있다. 이 책에서 소개된 4개의 다른 도시들도 비슷한 느낌이다. 첨단보다는 과거의 영화 속에 살고 있는 이 도시들이 최악의 시대적 문제를 만났을 때 어떤 대응을 할 수 있을지. 이 전통의 공간들이 다시 살아날런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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