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수레의 책읽기

[이사 그래피티] 요즘 같은 시대에는 하루키의 낭만도 다르게 보인다

슬슬살살 2020. 4. 23. 21:14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를 비롯해 몇몇 수필집에 실려 있는 하루키의 잡문중 하나. 잡지(관동지방에서만 파는)에 실렸던 기고문 같다. 하루키가 이사를 즐긴다는 내용과 왜 그런지에 대한 가벼운 단상이 실려 있는데 문학적으로 의미있는 단편은 아니다. 그냥 유명 작가 하루키의 자유스러움을 옅보여주는 에피소드일 뿐이다. 내용 자체는 별 게 없지만 재미있는 내용이 있다. 

1971년이란 해는 대학의 학생 운동이 일단 전성기를 넘어서고, 투쟁이 음습화되어 폭력적인 내부 투쟁으로 치닫기 시작한 아주 복잡하고 암울한 시기였지만 이렇게 돌이켜보니 실제로는 매일 여자 친구랑 데이트를 하거나 영화를 보면서 제법 뻔뻔스럽게 살았던 모양이다. 그러니 '요즘 젊은 남자들이 이러니 저러니 하고 잘난척 얘기할 수는 도저히 없을 것 같다. 인간이란 득별히 대의명분이나 불변의 진리나 정신적 향상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니고, 이를테면 깜찍한 여자애랑 데이트나 하면서 맛있는 것 먹고 즐겁게 살고 싶다고 생각할 뿐이다. 

요즘 코로나 대응에 대해 일본의 국민성, 국가의 선진성이 의심받고 있다. 거짓을 말하는 정부, 대응하지 않는 국민. 민주주의 국가라고는 믿기 어려운 대응인데 여기에는 가짜 민주주의의 역사도 한 몫 하는 것 같다. 하루키의 고백에 따르면 대학시절 나름 운동권이었다는데... 내용을 들여다보면 노닥거리는 수준이다. 한국의 대학생들이 최루탄 속에서 투쟁하며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운동할 때 데이트나 하면서 투쟁한다니.. 꼭 피를 흘려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 뿌리의 단단함이 다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 너희들은 이사나 다니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