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조직에 의지한 것이 설마 자신의 약점이 될 줄은.
복종.
피가 거꾸로 솟을 때가 있다.
미나코에게는 할 수 없는 이야기다. 실종된 외동딸을 찾아낸다. 살아 있는 아이를 품에 안겠다. 그걸 위해 부모가 견디지 못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64는 못생긴 외모를 비관해 가출한 딸을 찾고 있는 형사 아빠 '미카미'의 시점에서 바라본 며칠간의 이야기다. 지방 중소도시 경찰서에서 20년동안 형사 일을 한 베테랑인 미카미는 1년 전, 홍보부로 인사이동 당한다. 범인을 쫒지 못하는 홍보부는 무시당할 뿐만 아니라 수사 정보를 언론과 거래한다는 의심을 사고 있어 동료로서 인정받지도 못한다. 마음만은 형사인 미카미는 홍보실을 개혁하려 하지만 그냥 경찰의 입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상급자들과 계속 부딪혀온다 딸의 실종이 일종의 '약점'이 되어 미카미는 고민에 빠진다. 딸의 수색 독려를 위해 고분고분 따를 것인가, 자신이 옳다는 일을 밀어 붙일 것인가.
'64' 14년 전 '아마미야 쇼코 유괴 살인사건'을 가리키는 기호로, D현경 관내에서 처음 일어난 강력 범죄사건이었다. 몸값 2천만 엔을 고스란히 빼앗겼고, 납치된 일곱살배기 소녀는 참혹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아직 범인은 붙잡히지 않았다.
소설의 제목은 14년 전 D현에서 발생한 미제 유괴사건번호다.
D현경에서는 최고의 수치인 이 사건이 다시금 수면에 떠오르면서 형사부와 경무부의 갈등이 극에 달한다. 미카미는 그 한복판에서 수많은 딜레마에 빠진다. 경무냐 형사냐, 홍보담당관이냐 형사냐, 아빠냐 형사냐. 이 소설이 좀 어려운 이유는 일본 경찰의 조직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어서다. 일본의 경찰은 기본적으로 지방직이다. 본청이라 불리는 중앙직은 지방의 경무부(인사, 총무, 홍보 등 본부 권한과 공안 역할을 수행)하고 공채를 통해 선발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엘리트코스다. 반면 실제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부는 지역민들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로 치면 중앙직과 지방직 정도의 구분이랄까.
미카미는 층계참에서 걸음을 멈추고 우두커니 섰다.
위층은 형사부, 아래층은 경무부. 지금 서 있는 이곳이 자신의 처지를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미카미가 딸의 행방을 찾아 고군분투하는 중에 경찰청장이 시찰을 나오게 디면서 일이 급변한다. 경찰청장은 64의 피해자 유족을 찾아 분향하고 공소시효 전에 다시한번 경찰의 결집을 강조하는 회견을 하려 하는데 이 자리에서 형사부의 수장을 경무부 출신으로 바꾸려 한다는 첩보가 돈다. 당연히 형사부는 반발을 넘어 쿠데타 수준을 획책하고 경무부는 형사부의 약점을 찾으려 한다. 우리에게 익숙치 않은 일본의 경찰 조직의 정치공학을 깊숙히 다루고 있어 호불호가 갈릴 듯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흥미로웠다.
"난 본청에 돌아가 할 일이 산더미 같습니다. 이런 시골구석에서는 단 1칼로리도 허비하기 싫어여. 나라를 위해 일해야 한단 말입니다. 그게 아니면 아무 의미가 없어요. 어째서 그걸 모르는 건지....."
10년 동안 집필했다는 말처럼 디테일이 극한으로 살아있다. 14년 전 미제사건의 해결, 가정 내에서의 아빠와 딸의 갈등, 일본의 엘리트 주의에 대한 분노와 풍자, 언론과 경찰과의 관계까지 하나하나가 하나의 소설로 쓸 수 있을 정도의 소재들을 균형감 있게, 치우치지 않게, 그러면서도 지루하지 않게 써내려갔다. 문제의 해결 또한 명쾌하면서도 탄복을 자아내는 트릭을 이용한다. 존 버든의 '658,우연히'와 아주 살짝 비슷한 소재를 활용하긴 했지만 '딸을 잃은 아버지'의 감정을 100% 보여줄 수 있었다. 수많은 딜레마를 다루면서도 끝까지 힘을 잃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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