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너무 충격적이었다. 스릴러물로 보이던 영화가 도중에 히어로물로 바뀌다니. 영화는 대규모 열차사고에서 홀로 살아난 데이빗의 시선에서 시작한다. 조용조용한 성격에 예쁜 유부녀에게 선을 넘지 않을 정도로 집적대는 수준의 평범한 40대(?) 남자다. 아내와는 사이가 벌어졌는지 냉랭하게 이혼 직전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죽다 살아난 이번 사고로 관계가 개선된다.
이 사고는 릴라이저, 유리선생이라 불리는 인간이 저지른 것으로 영화의 종반부에 밝혀진다. 어린 시절부터 허약한 체질인 릴라이저는 뼈가 부러진 채 태어나 넘어지기만 하면 부서지는 불행한 몸을 가지고 있다. 히어로 만화에 심취한 그가 '나같은 몸이 있다면 어디엔가 강인한 히어로도 있을꺼야'라는 생각을 가지고 대규모 살상 사건들을 저질렀던 것. 그리고 실제로 데이빗을 찾아낸다.
이 영화의 포인트가 몇가지 있는데, 먼저 촬영 시점이다. 대부분의 화면이 훔쳐보듯 비쳐져서 실제로 은밀하게 벌어지는 일을 몰래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주인공을 똑바르게 따르지 않는 카메라는 영화가 끝날때까지 진실을 숨기는데 큰 역할을 한다. 그리고 데이빗의 아들이 아빠가 히어로라고 믿고 총을 겨누는 장면이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급박하면서 속으로 진짜 죽을까 하는 생각이 교차했다. 감독의 술수에 완전히 빠진거지. 마지막으로 모든 원흉이 릴라이저라는 것과 데이빗이 진짜 히어로라는게 밝혀지면서 영화는 끝난다. 그리고 약간은 멍한 기분을 가지게 된다.
태어나서 병원을 한번도 가본적이 없고 대규모 사고에서도 상처 하나 없이 홀로 살아나는 데이빗은 분명 히어로다. 하지만 일반적인 인간보다 조금 튼튼한 정도인게 아닌가 싶은 설정이 영화가 끝난 후에도 '진짜 히어로야?'라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건 히어로의 유무가 아니라, 릴라이저의 행동이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느냐다. 분면 자신의 신념을 찾아내기 위해 수백명의 사람을 죽였지만, 그 덕에 인류는 히어로를 얻을 수 있었다. 또, 릴라이저의 기괴한 집착의 이유 역시 나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무작정 미워할 수는 없다.
어벤져스와 D.C 스타일의 히어로물만 보다가 끝장나는 연출력 하나로 승부하는 히어로물을 보니 오랫만에 영화같은 영화를 본 느낌이다.
'영화 삼매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글래스] 새로운 오리진의 시작 (0) | 2020.06.28 |
---|---|
[23 아이덴티티] 영화의 형식을 부수고 튀어나온 빌런 (0) | 2020.06.11 |
[아사코] 난폭하고 아픈 이기적 사랑 (0) | 2020.05.28 |
[헌트] 자나깨나 이름 확인! (0) | 2020.05.16 |
[쥬만지: 넥스트레벨] 드웨인과 잭 블랙의 존재감마저 삼켜버리는 (0) | 2020.04.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