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일어보면 유치하기 그지 없는 신파의 한 가닥인 소설이지만 묘한 몰입도가 있다. 전후에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서울 토박이, 김관식이 겪는 이야기다. 관식은 대한민국이 가장 가난한 시절에 태어나 그래도 어영부영 고등학교까지는 다닐 수 있었다. 그리고 운명처럼 세희라는 여고생을 만난다. 첫눈에 반한 관식이지만 어째서인지 다가가지 못하고 정작 다른 친구들이 세희와 어울린다.
재필이의 용기가 관식이는 부러웠다. 그것이 설령 세희라는 여자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무엇인가 그렇게 확실하게 살아가는 목표를 정하고 있는 것 같은 재필이의 태도가 부러웠다. 그러는 자신은 무엇인가. 친구들이 말라르메를 이야기하고 보들레르를 얘기할 때에도 그저 시큰둥하기만 했다. 마음속에 무슨 심지가 있어서 그래 너희들은 미래의 말라르메 앞에서 시시한 얘기들을 하고 있구나. 그런 식으로라도 됐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한두 번 해 본것이 아니었다. 그저 졸업해서 국어 선생이나 하지...... 그게 고작이라니...... 스스로 생각해도 맹물!
이 소설은 바보 같은 관식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미인박명이라는 세희의 굴곡진 이야기이기도 하다. 독보적인 외모로 뭇 남성들이 꼬이지만 정작 안주하지 못하고 화려한 삶만을 추구하며 결국엔 윤락녀로 전락, 마약에까지 손을 대다가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한다. 종장에 이르러 자신만을 사랑한 관식을 만나긴 하지만 사랑을 이루는 대신 관식마저 파멸 시키며 삶을 마감한다. 그래도 선생이라고 나름 성공적인 중산층이 된 관식이 공금에 손을 대고 살인범으로 몰려 사형을 당하기까지 하니 '여자 잘못 만나 패가망신 한다'는 시대에 맞지 않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세희를 바라보는 재필이의 그 빛나는 눈. 그 것이 순수한 열정이 아니라 맛난 토끼를 눈 앞에 둔 늑대의 눈이라고 하더라도 그 눈빛 귀에 숨어 있는 빛나는 마음의 칼날. 하루 이틀이 아니라 몇 년, 몇 달을 갈고 닦아서 그 근처에만 다가가는 작은 줄기의 바람이라도 그 서슬 푸른 칼날에 낱낱이 베어져서 흔적도 없이 갈갈이 흩어질 것 같은 그 열정의 칼날 앞에 세희가 서게 된다면.
80년대 신파 드라마 같은 소재와 구성이지만 꽤나 짜임새 있는 구성이 관식의 바보 같은 사랑을 끝까지 지킨 열정으로 만든다. 신파는 유치하지만 외곬수를 가지고 있어 지금의 눈으로 보면 오히려 신선한 감이 있다.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시대적 배경을 살피는 것도 재밌었다. 강남의 개발로 졸부가 된 친구라던지, 박정희를 욕하면서도 매일 쌀밥을 먹게 해 준데 대한 무한한 감사, 군부에 줄을 댔다가 한 순간에 날아가버린 친구까지... 진한 문제의식 대신에 주변인으로서 감상적인 스케치에 그치기는 했지만 아무렴 어떤가. 그 당시라고 모두가 운동권이었을리는 없지 않은가. 어떤 바보같은 소시민은 남의 여자가 되어 버린 첫사랑만 그리면서 살았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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