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수레의 책읽기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매일 나를 응원하며

슬슬살살 2020. 6. 22. 22:13

공지영의 소설을 많이 접하지 않았다 생각했는데 은근히 읽어 왔다. 청소년 필독서였던 <봉순이 언니>는 말할것도 없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같은 작품들도 맛깔나는 글에 감탄하며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작가 공지영이 작품 아닌 다른 활동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부터 조금식 편견과 함께 멀어진 듯 하다. 톡톡 쏘는 그녀의 어법, 내로남불식으로 변하는 가벼운 트윗으로 인한 일이니, 완전히 억울하다 하기는 어려울 일이다. 대중의 오해건 뭐건 간에 시작은 그녀의 손끝이었으니...

엄마는 작가이고 그래서 여러 사람들의 리뷰와 블로그에 실린 엄마의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읽게 된다. 가끔 터무니없는 오해와 편견으로 상처 입곤 하지. 그들과 나 사이에는 특별한 애정이라곤 없기에 그들은 엄마의 글을 엄마와 동일시하고 그리고 상처를 입힌다. 

이러한 사실과 무관하게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으니 그녀는 분명 반짝반짝 빛나는 글재능의 소유자라는 사실이다. 물론 작가는 작품과 행동이 일치할 때 가장 빛나는 법이다. 과거 이문열의 펜끝이 그를 사랑하던 이들을 얼마나 슬프게 했던가. 그럼에도, 이문열의 작품은 빛난다. 단순히 사상이 바뀌어서 작품이 무뎌진 것이 아니라 나이 탓이리라 믿는다. 나 또한 이 책을 펼치면서 색안경을 끼고 읽기 시작했다. 행간의 의미보다는 그녀의 말실수를 잡아내기 위한 내 모습을 느끼고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더라. 그녀는 그녀대로 딸에게 보내는 편지형식을 빌어 이토록 응원의 글을 보내고 있는데 말이지.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는 대부분 글이나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 작가가 매 편 마지막에 덧붙이는 수영에 대한 변명처럼, 하려 하지만 대부분 실패한다. 이 산문집의 주제는 수영이다. 매일매일 가야지가야지 입으로는 외지만 한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그 계획. 그러나 삶이 라는건 '어떤 삶을 살더라도 나를 응원할 때'가 아닐까. 

위녕이라는 그녀의 딸에게 보내는 매일의 편지 형식이다보니 쓸 때의 기분에 따라 좀 들쭉날쭉하다. 자유롭게 살기를 바라지만, 세속적인 성공을 바라는 한켠의 마음. 좋아하는 걸 하라면서 공부는 잘했으면 하는 모순처럼 말과 행동이 왔다갔다 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 어떤 글이건 위녕에 대한 사랑과 응원이 넘쳐난다는 거다. 우리는 모두 처음의 삶을 살고 있다. 누구나 처음 맞는 오늘을 마주하고 부딪히면서 살아간다. 부모로서도 이게 옳다는 확신이 없이 바램을 자녀에게 투영하는게 일반적이다. 그 부족함을 인정하고 보면 그녀의 글이 여전히 세련되고 생동감 있음이 다시 느껴진다. 

 

희망과 소망을 혼동하지 말자. 우리는 온갖 종류의 수천 가지 소망을 가질 수 있지만 희망은 단 하나뿐이다. 우리는 누군가가 제 시간에 오길 바라고, 시험에 합격하기를 바라며 르완다에 평롸가 찾아오기를 소망한다. 이것이 개개인의 소망들이다. 
희망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그것은 삶의 의미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만약 삶이 아무런 목적지도 없고, 그저 곧 썩어질 육신을 땅 속으로 인도할 뿐이라면 사라서 무엇하겠는가? 희망이란 삶에 의미가 있다고 믿는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