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박완서 / 흥타령-박재희 / 침묵속을 더듬으며-유덕희 / 꼬레-윤명혜 / 예이-이혜숙 / 훈풍-조양희 / 그건 아직도 법이 아니라 - 조혜경 / 당신의 땅 그리고 나의 땅 - 안혜성
이 책은 1997년 여성동아 문예전의 당선작들의 모음집이다. 당시에도 여성 소설가의 거목이었던 박완서를 필두로 8명의 여성 소설가들이 필력을 뽐냈다. 아쉽게도 박완서님을 제외하고는 이름들이 낮설다. 아마추어를 대상으로 하는 공모전이 아니었기에 나름 성공적인 등단이었을텐데 확실히 글로 성공한다는게 쉽지 않음을 새삼 느낀다.
젠더 갈등이 극에 달한 지금 이십여년 전의 여성작가들의 생각을 읽는 건 흥미로웠다. 50년의 한국전쟁을 시작으로 산업화 전체를 살아온 중년의 여성 작가들이 시대를 바라보는 방식은 확실히 남성과는 다르다. 전통적인 가부장에 대한 거부감과 전통적인 사고방식이 혼재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 작고한 남편을 여덟개의 모자를 통해 기억하는 박완서 작가의 사부곡은 전통적인 사고방식의 여성이 새롭고 주체적으로 사랑하는 방식을 재치있게 그려냈다.
또 여성의 눈으로 바라본 시대상도 잘 나타난다. '당신의 땅 그리고 나의 땅'에서는 80년 광주를 외면했던 기자가 광주 출신의 여성을 만나면서 사실을 직시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전라도 깽깽이'로 대표되는 지역감정의 형성과 그 해소까지 담고 있는 수작이다.
여자들의 인권과 인격의 파괴자는 단지 가부장제 아래의 사회제도나 남자들의 여성차별 탓만은 아님을. 여자들 사이에 도도히 버티고 있는 치사한 경쟁심과 질투심 역시 여자의 생존과 위치를 갉아먹고 있었던 것이었다.
게다가 이 과정에는 한없이 낮았던 '여성의 인권'의 문제가 여실히 드러나기까지도 한다. 당시에 여성을 괴롭히는 전통적 사고방식의 선봉에는 고부 갈등이 존재했다. 그러니까 남자가 아니라 시어머니로 대표되는 여성에 의해서 문제가 발생한다. 물론 그 이면에는 남성중심의 사회상과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인 시대상도 있지만. 그러나 이러한 인권 유린의 대물림을 짚어낸 이 역시 여성 소설가라는 점은 곱씹어볼 만 한 대목이다.
놀라움과 동정심 외에 찜찜한 감정의 찌끼와 기이한 두려움이 수반되었던 그 복합적인 느낌. 이는 어쩌면 광주의 비극을 바라보는 '광주 사람 아닌' 그리고 '광주의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닌' 사람들의 복잡다난하면서도 이중적인 느낌과 궤를 같이하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단순히 광주의 비극을 자초한 군부의 비열한 통치욕만을 향해서 욕설을 퍼붓고 삿대질 하는 것으로는 결코 후련해지지 않는 그 미묘한 느낌을 나는 과연 어떻게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광주 사람에 대한 연민과 미안한 마음만으로는 깨끗이 지워지지 않았다.
또 이 작품에는 광주에 대한 부채감, '무식'으로 인한 지역차별행위와 그 반성까지 담고 있는데 광주를 직접 겪지 않았음에도 5.18망언에 열이 뻗치는 평범한 시민들이라면 꼭 읽어볼 만 하다.
공산주의나 공산당, 하면 머리에 뿔 난 뻘건 도깨비로 확신하는 계층도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두세 권의 사회주의 서적을 읽고는 햄버거 먹은 기름기가 가시지도 않은 입술 위에 레드 콤플렉스 따위의 매끄러운 단어를 올려놓는 학생들도 이젠 좀 넌덜머리가 나는 편이었다.
'그건 아직도 법이 아니라'는 또 전혀 다른 시각을 제공한다. 운동권에서 조금 떨어져 있던 속칭 '회색분자'의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진보적 성향을 띄는 소설가들의 세계에서 조금 독특하다. 물론 이 공모전의 주최사가 동아일보였다는 걸 생각하면 조금은 이해할 만 하다. 그래도 다양한 시각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여덟편의 작품 모두 이십년이 지난 지금도 신선함을 느낄 정도로 수준이 높은 소설들이다. 오랜만에 만난 박완서 작가님도 너무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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