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수레의 책읽기

[사랑 후에 오는 것들] 두 나라의 작가가 부르는 한일 로맨스

슬슬살살 2020. 8. 8. 09:45

그와 나 자신 속에 우리가, 그의 조국 일본과 내 조국 한국의 긴 시간들이 지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인이나 중국인이나 영국인 애인과 헤어질 때는 결코 사용하지 않았을 그 말, 너희 일본 사람들... 그건 종결되지도 못하고 용서하지도 못하고 마침내 화해하지도 못한 긴긴 역사의 그늘이었다.


<냉정과 열정사이>로 한국을 휩쓸었던 츠지 히토나리의 두번째 듀엣. 이번에는 공지영과 펜을 나눴다. 남자와 여자가 같은 이야기를 각각의 시선으로 써 내려가는 방식이라는 독특함은 지난번 <냉정과 열정사이>에서도 보여준 바 있다. 이번에는 남과 여에 더해 한국과 일본이라는 민감한 문제까지도 글 안으로 끌어들인다. 한국 여자와 일본 남자의 만남과 헤어짐은 너무 통속적이고 평범하지만 열정적이다. 거기에 두 작가의 역사관도 엿볼 수 있는 수작이다. 

내 일본어의 의식 속에 윤동주가 엮어 낸 한국어 단어 하나하나가 용액처럼 스며들기 시작했다. 만난 적도 없고 전혀 다른 시대를 살았던 그의 말이, 그에게는 외국인인 내 마음에 그대로 배어들었다. 


만약 내가 이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하고 레코드 가게를 나오며 생각한다. 나는 일본을 미워했을가. 홍이처럼 윤동주가 걸어온 길을 조사하기 위해 일본에 유학을 갔을까. 그리고 거기서 한국인인 나는 어떤 일본을 발견했을까. 

먼저 츠지 히토나리. 대표적인 친한 작가 답게 글 곳곳에 윤동주 시인에 대한 팬심이 묻어난다. 직접적으로 민감한 가치관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국가간의 불편한 관계와 개인의 사랑이 어디까지 상호작용할 것인가가 츠지 히토나리의 글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불편함을 드러내는 홍이를 보면서 한국을 이해하기 위해 애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마땅한 역사관을 드러내지 못하고 단순히 이해의 차원에서만 이 문제를 바라본다는 것. 


심각하다는 건 이처럼 쌓여가는 사소한 일들 위에 몇몇 오해와 아무 생각 없이 한 이야기들이 왜곡되어 만들어지는 것이다. 


사사에는 홍이가 자기를 왜 떠났는지 알지 못한다. 요즘 젊은 일본인들이 한국의 반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둘의 사랑처럼 사소한 일들에 쌓인 오해가 아니라는 사실을 저들은 알지 못한다. 게다가, 사사에가 인식하고 있는 사소함과 오해의 결합만이 홍이가 떠난 이유는 아니었다. 홍이는 진정성을 바랄 뿐이었다. 

잊는다는 건 꿈에도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내가 잊으려고 했던 것은 그가 아니라, 그를 사랑했던 내 자신이었다. 그토록 겁 없이 달려가던 나였다. 


"잊지 못할 줄 몰랐어. 실은 잊지 못할 줄 알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오랫동안 잊지 못할 줄은 몰랐던 거야. 결국 넌 영원히 나와 함께 살아가게 된 거야. 어쩌자고 돌아왔지, 이 나쁜 자식아, 이 나쁜 자식아."

홍이는 어땠을까? 공지영 작가의 손 끝을 빌린 홍이의 이야기는 사사에편과는 또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이 글에서 홍이는 사사에를 이해하지 않는 이기적인 여자로 비춰진다. 하지만 홍이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열정과 "일본은 안돼"라는 가족의 반대 사이에서 갈등하는 여자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과거를 잊으려 하지만 결국은 잊을 수 없으며 함께 공존해야 함을 깨닫는다. 

"내가 언제 못하게 했어, 먹으면서 천천히 하라고 했지. 말할 시간은 많을거야. 그러다보면 그 말을 하는 동안, 네가 말하는 그 감정이라는 것도 변해 가. 네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도 잊어버리고, 네가 왜 그 말을 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게 되고, 감정은 변하는 거니까. 그건 고마운거야. 변하니까 우린 사는거야."


때로는 달콤한 유혹도 있다. 천천히 감정을 정리하다보면 된다는 얘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다. 하지만 저 설득 또는 충고는 사사에와 홍이 사이를, 홍이의 감정을 나아지게 하기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국과 일본의 과거는 둘의 사랑처럼 단박에 해결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거기에는 무작정 홍이를 찾고 용서를 구했던 사사에와 같은 결단력이 필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