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de A: 근처 / 누런 강 배 한 척 / 굿바이, 제플린 / 깊 / 끝까지 이럴래? / 양을 만든 그분께서 당신을 만드셨을까? / 굿모닝 존 웨인 / 축구도 잘해요 / 크로만, 운
side B: 낮잠 / 루디 / ??(龍+龍+龍+龍) / 비치보이스 / 아스피린 /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줬어요 / 별 / 아치 / 슬(膝)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졌던 작품이었다. 이렇게 재기발랄하게, 배꼽 잡게 웃기면서도 인생에 대한 고찰을 담아내는 방식은 그의 선배들보다 어깨에서 힘을 뺐지만 진중함은 뒤지지 않았다. 비슷한 세대의 김연수 작가나 김영하 작가도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지만 박민규 작가는 약간은 기인처럼, 약간은 도사같은 느낌이다. 자유분방한 그의 스타일은 작품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박민규 작가가 여기저기서 발표했던 단편들을 모아서 하나의 음반처럼 엮어냈다. A면과 B면으로 되어 있으니 정확히는 아날로그의 대명사인 테잎과 같은 형태가 되겠다. 각각의 단편들이 일관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어린시절을 떠올리면서 인생의 무상함을 다루는 <근처>같은 작품이 있는가 하면 SF영화 같은 배경에 반전까지 갖춘 <양을 만든 그분께서 당신을 만드셨을까?> 같은 단편도 있다.
더는
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견디기 힘든 것은 고통이나 불편함이 아니다. 자식에게서 받는 소외감이나 배신감도 아니다. 이제 인생에 대해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은데, 이런 하루하루를 보내며 삼십년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소소하고 뻔한, 괴롭고 슬픈 하루하루를 똑같은 속도로 더디게 견뎌야 하는 것이다. 인생을 알고 나면, 인생을 살아갈 힘을 잃게 된다. 몰라서 고생을 견디고, 몰라서 사랑을 하고, 몰라서 자식에 연연하고, 몰라서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어디로 가는 걸까? (치매에 걸린 마누라와의 마지막 여행, <누런 강 배 한척> 中)
모든 작품이 제각각의 매력을 가지고 있지만 나름의 공통점도 있다.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보헤미안들이다. 인생을 여행처럼 왔다가 빡시게 여행하고 마지막을 궁금해 하는 사람들. 그리고 불연듯 나타나는 여정의 끝에서 마지막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대한 고찰을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이 가지고 있다.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박민규만의 독특한 점이 있는데 중요한 문장을 불규칙적으로 자르면서 글에 쉼표보다 더한 리듬을 부여한다.
더는, 살고싶지 않다와,
더는
살고 싶지 않다. 를 비교해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이 리듬은 긴박한 글 읽기 도중에 숨 쉴 공간을 의도적으로 넣어주면서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를 받을 여유를 만들어준다는 측면에서 아주 영리한 글쓰기이다.
그러고 보니 가스요금 낸다는 걸 오늘 또 깜빡했다. 고지서를 현관에 붙여두고도......그냥 나왔다, 지나쳐 버렸다... 내야 할 요금, 해야 할 일, 요금 일 요금 일 요금 일... 모르겠다, 복잡했던 그 세계도 날이 밝으면 사라질 것이다. 즉 너도 끝나고 나도 끝날거라는 사실, 비로소 끝을 낼 수 있다는 이 사실... 간단히 떠오르는 생각 하나는 분명 신은 있다는 것이다. (자기를 나락으로 빠트린 꽃뱀에게 우스꽝스러운 복수를... <별>中에서)
<별>에서 주인공은 꽃뱀에게 걸려 바닥까지 떨어진 인물이다. 대리운전을 하며 하루하루를 가난에 쫒기던 이가 드디어 원수(?)의 대리운전을 맡아 함께 죽기로 결심하는 터에 머리에 떠오른 건 가스 요금 고지서다. 지루함의 반복이 우리의 일상이고, 절체 절명의 순간에도 그 루틴이 떠오른다는 표현을 통해 삶에 대한 강한 의지가 있음을 간접적으로 알려준다.
이렇게 박민규 작가는 사소한 삶의 오브제를 이용해 글에 생동감을 높이고 여기에 특유의 잘라쓰는 방식으로 집중도를 올린다. 모든 주인공들이 삶의 의미를 찾아 헤메지만 성공과 실패는 랜덤으로 주어진다. 우리를 빼닮은 소설속의 인물을 보며 우리는 생각한다. 그저 충실하게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한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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