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아원에 버려져 자라고 성폭행과 원치 않는 출산, 백혈병까지 걸리는 비운의 여인 서희와 그녀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베푸는 고아원 운영자의 아들 세준, 세준에게 질투를 느껴 서희를 빼앗으려는 재벌가의 서자 민혁의 이야기다. 내용만 봐도 알 수 있겠지만 전형적인 최루성 멜로 소설이다.
최루성 멜로물, <가시고기>가 공전의 히트를 친게 2000년이다. 그때의 한국은 정말이지 매일같이 울고 싶었나보다. 삶에 지친 아버지의 초상을 그린 <아버지>를 필두로 수많은 영화와 소설이 있는 눈물 없는 눈물을 짜내던 시기다. 아마 IMF로 인해 우울해진 세상을 눈물을 흘리지 않고 버티기 힘들었나보다.
우리는 슬픈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야. 아름다운 사랑을 하고 있을 뿐이지.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사랑일지라도.
<가시고기>의 작가 조창인은 97년 <그녀가 눈뜰 때>를 발표하고 이 소설이 류시원과 김희선이 주연으로 출연한 드라마, <세상 끝까지>로 만들어져 성공하면서 후속작인 <가시고기>까지 큰 사랑을 받는다. 이후, 성공적인 월드컵 개최와 IMF 조기졸업으로 더 이상 울필요가 없어진 대한민국은 조창인 작가를 잊는다.
작품에 최루 외에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다면 조금 더 활동을 이어갈 수도 있었지만 본래부터 재능있는 작가는 아니었다. 지금에 와서 살펴보면 너무나 전형적이고, 시드니 셀던식의 서사는 고루하고 지루한 긴 호흡을 보여준다. 열정적인 사랑을 받고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는 점에서 베르테르 스토리이기도 하다. 베르테르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시기는 사춘기 한정이라는 점에서 당시 한국 사회는 참으로 미숙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스코틀랜드 의사들이 가장 철저히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그는 한없이 부러워하곤 했다. 완벽한 의료제도, 그리고 의료 윤리를 볼 때마나 떠나온 조국의 현실을 떠올리곤 했다. 얼마든지 완치될 수 있는 병인데도 돈이 없이 죽어가는 동포들의 현실이 안타깝기만 했다. 돈벌이로 전락하고 만 느낌인 우리나라 의료윤리가 개탄스러웠다.
당시의 한국이 세계를 보는 시점은 한없이 약자가 강자를 부러워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97년 IMF 직전까지 국민소득 2만불 시대의 축포를 터트리고 있었음에도 한국의 사회적 성숙도는 한없이 낮고 자존감은 결여되어 있었다. 고작 스코틀랜드의 의료환경을 부러워하는 수준이었다니...이렇게 옛 소설들은 의도와 관계없이 당대의 사회적 상황을 알려주는 즐거움이 있다.
해가 구름속에 가리워진 흐린 날에는 해바라기 꽃은 어떤 모양새를 하고 있을까? 아예 고개를 땅쪽으로 처박고 있을까? 고개를 든다면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을까? 흐린 날에도 해바라기 꽃은 정확히 해가 있는 방향을 향해, 구름 저편의 해가 움직이는 대로 함께 움직인다. 또 해가 지고나면 꽃은 어떤 모양새를 취하고 있을까? 아니다. 해바라기 꽃은 해가 떠오를 동쪽으로 향해 밤새 내내 그렇게 있다.
고작 23년 전, 우리 사회가 추구하는 여성상이라는 건 50년 전에 비해 조금도 앞서지 않았었다. 시대는 바뀌어 여성들의 직업은 대학생으로 조금 전진했음에도, 수동적인 역할, 날라리, 혼전 순결과 지고지순함은 사회에 지표로 살아 있었다. 거꾸로 생각하면 '서희'로 대표되는 수동적인 여성상이 20년동안 바뀐 걸 보면서 우리 사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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