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삼매경

[1987]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어요? 물론!

슬슬살살 2021. 2. 4. 21:28

1987년은 내가 8살이 되던 해이다. 뚜렷하지 않은 어릴 적 기억 중에 지금까지도 뇌리에 남는 말이 있다. 어린 내가 엄마에게 전대통령이 무어냐 물었던 기억이다. 추정컨데 '전대통령은 오늘~ 하고 시작하는 땡전뉴스를 보고 물었으리라. 어린 마음에 전대통령이라면 지금 이전의 대통령일텐데 왜 지금 뉴스에 나오냐 하는 물음이었는데 그 때 엄마의 답을 또렷히 기억한다. '그런소리 하지 말아 잡혀가'. 엄마도 농담이 아니었고 나도 무섭게 받아들였는지 그 이후로 비슷한 질문을 한 기억이 전혀 없다. 그만큼 컴컴한 세상이었다.  

1987년의 6월, 대한민국은 박종철이라는 학생의 죽음으로 뜨겁게 달아오른다. 직장인도, 지금은 조중동이라 희화화 되는 기자들도, 종교계에 이르기까지 정도만 다를 뿐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시기였다. 그 부글거림의 마지막 1도씨는 명문대 학생이 고문으로 숨졌다는 사실과,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국민 알기를 개뿔로 아는 이들로 인해 마침내 폭발한다. 그 이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는 그대로다. 

<1987>은 무고한 사람의 참혹한 죽음에 접했던 자들 중 용기 있는 선택을 한 사람들을 감동적으로 그려낸다. 이 영화의 악은 특히 박 처장(김윤석) 한 사람에 집약되어 묘사되지만, 선은 그렇지 않다. 희망은 작은 고리의 연쇄에서 나온다. 역사의 물줄기도 그럴 것이다. 그렇게 정확히 한 세대를 사이에 두고 1987년과 2017년의 광장은 뜨겁게 공명한다. - 이동진,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 中

이 영화는 그러한 근대 기록을 서사화 하여 스크린으로 옮겼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을진대 수많은 인물들의 복잡한 관계와 사실을 해치지 않으면서, 창작 인물이 사건에 개입하지 않으면서, 영화적 흥미를 놓치지 않으며 만들어낸 이 영화는 놀랍다. 복잡한 역사적 사건을 다루기 위해 장준환 감독은 유명 배우들을 무섭게 집어 넣는다. 사건의 배경을 몰라도 인물을 단박에 이해할 수 있게 함인데 이는 영화의 성공에 큰 기여를 한다. 예를 들면 동아일보 사회부장의 이름은 자막이 지워짐과 함께 잊게 되지만 고창석=열혈기자라는 기억은 살아있기 때문에 일부러 인물 관계와 앞뒤 정황을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김태리의 투입 역시 영화의 성공에 기여했다. 특별출연한 수많은 배우들에 비해 아직은 인지도가 낮지만, 그녀의 신비로운 이미지는 마치 관객을 대신해 그 시절로 돌아간 시간여행자 같은 느낌을 준다. 너무 깊지도, 얕지도 않게 관객은 그녀의 눈을 통해 당시의 혼란한 상황에 깊이 빠져 들어간다. 우리 근대 사회의 처참하며 아픈 기억과 민주주의에 대한 뜨거운 노력, 영화적인 완성도까지 모두 잡아낸 놀라운 영화다.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어요?, 물론 바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