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은 많이 들어봤지만 이번에 처음 읽었다. 제목이나 표지 삽화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 정도로 생각됐는데, 맞았다. 이 소설에서 좀머씨는 동네의 좀 이상한 사람이다. 작품의 시대적 배경으로 봤을 때 좀머 씨는 무언가 사회적인 고통을 겪었음에 틀림이 없다. 전쟁이나 홀로코스트, 혹은 그보다 더한 어떤 일을 겪어서 머리가 이상해진 사람. 한국의 근현대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그런 인물이다. 재밌는 건 소설의 끝까지 그가 왜 그러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 이 소설에서 중요한 건 '왜'가 아니라 '간절한 은둔'이다. 숨고 싶고 도망가는 나를 잡지 마시오라는 간절한 바램.
정작 그가 어디를 그렇게 다니는 것인지? 그러한 끝없는 방랑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그리고 무엇 때문에 그가 그렇게 잰 걸음으로 하루에 열 둘, 열 넷 혹은 열 여섯 시간까지 근방을 헤매고 다니는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한국 소설의 등장인물이 아픔을 이고 지고 사는데 비하면 좀머씨는 오로지 걷는데 그 에너지를 다 쓴다. 폐소공포증과 같은 증상 때문에 차에도 못타고 집 안에도 있지 못하는 좀머씨는 마치 미친 사람처럼 하루 종일 걷기에 애쓴다. 소설의 끝까지 좀머씨가 왜 그렇게 걷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맨 마지막, 좀머씨가 스스로 사라지는 결말로 마침내 평안을 찾아낸 은둔자를 보여준다. 어쩌면 좀머 씨는 스스로 은둔했던 저자 파크리크 쥐스킨트의 자아가 아닐까. 좀머 씨와 퀴스킨트는 동시에 절규한다. 제발 나를 그냥 놔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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