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소득이 이슈가 되는 건 비단 우리나라의 상황만도 아니고 코로나가 불러일으킨 특수한 상황도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 중간이 사라지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 나 뿐은 아닐 것이다. TV 광고에서 중소기업은 보이지 않고 중산층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의 벌이는 최소한 대기업 초봉 이상의 급여 소득자에 국한된다. 우리나라에서 그정도 급여 소득자라는게 상위 10%라는 믿기지 않는 사실과 함께 우리 사회는 분열되고 있다. 때문에 소외된 나머지 90%는 더이상 이 간극이 노력으로 메꾸어지지 않음을 알고 기본 소득을 요구하고 나섰다.
산업 전반에서 고도로 숙련된 상위 근로자들이 중간 숙련도를 갖춘 중산층 근로자들을 경제 생산의 중추에서 밀어냈다. 모든 경제부문을 통틀어 혁신 때문에 중산층 직종이 소수의 폼 나는 직종과 대다수 암울한 직종에 밀려나고 있다. 그 추세가 어찌나 급격한지 폼 나는 직종의 막대한 소득은 엘리트에 유리하고 중산층에 불리한 소득 재편의 가장 큰 원인이며 또 엘리트의 소득 상승과 중산층의 소득 정체를 유발한 주요 원인이기도 하다.
능력주의는 노력한 만큼 소득을 올린다는 전제 아래서는 합리적이었다. 그러나 21세기가 요구하는 능력은 노력으로 메울 수 없는 능력이어야 한다. 그냥 숙련 노동자가 아닌 고도로 숙련된 노동자 - 예를 들면 스티브 잡스나 마크 저커버그 같은 이들 -이 노동자 1만명을 대체하며 산업에서 직접 생산을 하기 시작했다. 과거 생산성이 없는 귀족에 비해 도덕적 합리적 명분을 가진 신흥 귀족의 탄생이다. 이 신흥 귀족이 능력주의라는 전가의 보도를 가지고 이 세상을 양극화 시키고 있는데 이 '능력주의'가 가진 '공정성'이라는 매력에 빠져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뿐이다. 모두가 스티브 잡스가 아니면서 모두가 스티브 잡스이기를 바란다는 건 모순이다.
능력주의는 귀족주의와 마찬가지로 엘리트 계층과 나머지 계층을 전반적으로 분리하고 엘리트 겨층이 세대를 거쳐 특권을 누릴 수 있도록 한다. 탁월한 교육의 특권은 부유한 학생들이 누리고, 윤택한 직업의 특권은 교육 수준이 높은 근로자들이 누린다. 여기서 좋은 교육과 좋은 직업이라는 두 가지 특권은 서로를 뒷받침하고 같이 성장한다. 이처럼 각 가정은 물론 엘리트 계층 전반에서 나타나는 왕조적 특성을 인식하면 능력주의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파악할 수 있다.
특히 21세기의 능력주의는 대다수의 중간 노동자를 잉여 인간으로 만드는 동시에 엘리트들에게 과도한 근무를 요구한다. 이제는 중간 노동자가 오히려 게으르고(혹은 일이 없고) 상위 노동자는 착취당한다.
미국에서 저주받은 자원은 석유, 금, 다이아몬드 등의 물리적 부가 아니라 인적 자본이다. 상위 근로자의 특별한 능력은 그들에게 의존하는 경제를 왜곡한다. 인적 자본의 집중은 생산의 초점을 다시 금융과 엘리트 경영 등의 상급 노동력을 활영하는 산업과 직업에 맞추는 혁신을 유도한다. 게다가 이런 산업은 점점 더 폭이 좁아지는 상위 근로자들에게 부와 권력을 몰아준다.
이런 현실에서 엘리트 노동자의 능력은 어쩌면 저주받은 자원일 수 있다. 우리는 이런 논의를 불편해 한다. 생활의 간극을 능력주의의 결과로 치부할 때 엘리트의 과도한 부의 편중은 정당화 되고 가난은 노력하지 않은 자의 어쩔 수 없는 결말이 되어 버린다. 고로, 간극은 줄어들 명분이 없어진다.
고도로 심화된 불평등 속에서 질서를 회복한 '유일한 사례'는 1920~1930년대 미국 사회였다. 간단히 말해 뉴딜 체제를 채택해 대공황에 대응했고 20세기 중반의 중산층을 구축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중산층이 늘어나면서 경제가 살아나며 불평등이 줄어든 시기는 '뉴딜' 을 이용해 전 국민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던 사회주의 모델이 도입되었던 시기다. 고도화 된 자동화, 초고도의 전문적 지식과 정보사회는 과거의 노동과 분배 모델을 완전히 리셋할 것을 요구한다. 능력도 중요하지만 최소한의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권리. '기본 소득'에 대한 연구가 의미있는 이유다. 이 책이 자본주의와 능력주의를 가장 신봉하는 미국, 그 미국 최고의 엘리트 학교인 예일 교수의 글이라는 건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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