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수레의 책읽기

[불멸] 영웅은 없다

슬슬살살 2021. 11. 3. 21:05

우리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두사람이라면 광화문 한 복판에 앞뒤로 서 있는 두 영웅이다. 한 명은 세종대왕이고 나머지 하나는 이순신이다. 세종대왕이 정력가이고 욕설을 즐겼으며 고기가 없으면 밥상을 물렸다는 사실처럼 이순신에게도 인간적인 면이 있었으니 김탁환 작가의 이 소설은 인간 이순신을 고찰한다. 물론 '칼의 노래'라는 역작이 있기는 하지만 이순신의 인간적인 약점까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이 소설에서 우리가 알던 이순신은 보이지 않고 원균의 공을 질투하고 공과를 다투는 모습까지 적나라하게 파헤친다. 때문에 소설을 읽다 보면 처음에는 강한 거부감이 느껴진다. 우리가 아는 성웅, 충무공이 이리도 초라하다는 점에서 오는 괴리감은 소설을 읽는 내내 불편함을 준다. 그럼에도 '불멸'이 의미있는 작품인 건 이순신과 임진왜란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임진년을 살아가는 오만 군상들을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비겁함의 대명사인 원균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장으로, 광해군은 욕망의 덩어리로, 선조는 권력에 집착하는 인간으로 나온다. 그나마 유성룡 정도가 우리가 알고 있는 수준으로 그려진다. 


이제 서서히 광해의 목을 조르고, 광해와 내통하고 있는 유성룡과 그의 도움을 입은 이순신을 내치는 일만 남았다. 첫술에 배부를 수가 없으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선조의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신성군이 왕위에 오르면 세상은 나 윤환시의 것이 된다. 그는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곳은 무릉도원입니다. 마음껏 웃으시옵소서, 전하 마음껏 즐기시옵소서, 전하. 


먼저 선조의 주변에는 왕의 눈을 흐리는 내시가 등장한다. 가뜩이나 정보가 단절된 중세 조선에서 임금의 주변에서 혼란을 부추기는 인간이 가진 힘이란 건 어마어마 하다. 그 어떤 고위층도 임금의 바로 옆에서 조언을 하는 환관을 이기지 못하는 건 현재나 그때나 마찬가지다. 

공론에 밀려 광해군을 세자에 앉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제거하기 위해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선다? 책임과 의무를 부여한 후 여차하면 약점을 물고 늘어지겠다는 뜻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온몸에 소름이 돋고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부자의 정을 끊고 화근의 싹을 과감이 도려내는 것. 그것이 바로 군왕의 냉혹함이다. 


또, 전쟁의 업화가 눈 앞에 닥쳐도 정세를 읽기 보다 가진 권력을 놓지 못하는 선조도 있다. 실제로 전쟁중에 편협한 사고로 바뀐 세상에 대항하지 못하는게 어찌 선조 뿐일까. 김탁환 작가가 대단한 건 주인공 보정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는데 있다. 권력에 집착하는 인간의 속성을 치밀하게 파헤쳐, '아. 이럴 수도 있겠구나. 이게 더 현실적인데?'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때문에 '불멸'은 불편한 리얼함을 가진다. 


아버지는 나를 털끝만큼도 믿지 않는다. 그래서 빈궁의 목숨을 담보로 내게 권력을 떼어주며 생색을 내고 있는 것이다. 이틀 만에 분조를 꾸리기한 불가능하다. 신하들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분조를 호위할 군사는 열 명도 채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아버지의 은혜가 강과 바다처럼 깊고 넓다고 말해야 한다. 이다지도 좁고 흙탕물 튀는 하해도 있단 말인가? 내 오늘은 이대로 물러가지만 다시는 이런 치욕을 감내하지 않으리라. 전쟁이 끝나는 날, 조선의 주인은 바로 나 광해일 것이다. 민심을 끌어모아 천명을 받들리라. 그러므로 나의 아버지여! 아무 염려 마시고 압록강을 철퍽철퍽 건너가소서. 아버지가 버리고 떠난 이 나라 조선은 이 천덕꾸러기 아들 광해가 혼자서 지키겠습니다. 


광해군 역시 조선의 백성 보다는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야망가로 그려진다. 백성의 안위보다는 조선의 왕이 되는것만을 요구하는 자. 그게 광해다. 


우리에게 단 한 번의 패배는 곧 삼도 수군의 전멸을 뜻하네. 그러므로 지금 상황에서는 나 이순신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어. 나는 화려한 승리보다 단 한 번의 패배를 걱정하고 있네. 필승의 확신이 서지 않고서는 결코 군선을 움직이지 않을걸세. 


이순신도 마찬가지다. 원균과 공을 다투는 모습에서 나약한 인간이 느껴진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전략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모습에 있다. 이기기 위해서라면 임금의 명도 무시하고 주변의 사람도 내치는 모습. 그러나 자신의 여인을 위해 불법도 행하는 모습은 영웅을 사람의 위치로 끌어내린다. 불편하다. 하지만, 임진년의 조선은 그리도 혼란했고, 수많은 영웅들도 역시나 인간의 욕망 속에서 움직일 뿐이었다. 우리가 '불멸'의 조선에서 현재를 본다면 지금 세상 역시 영웅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쟁투하는 모습으로 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