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사하고 치사했다. 어디 나 뿐이겠는가. 어둠 속에 귀를 열어놓고 있으면 밤낮없이 사람들이 아우성, 아우성치는 거대한 소음이 고요한 호숫가에까지 들리는 듯했었는데, 그 역시 세계의 모든 아버지들이 중얼거리는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의 장대한 합창이었던가 보았다. 애비들이 치사하면 세상이 모두 치사해 진다는 아버지의 말은 하나도 그른 데가 없었다. 치사한 아버지들과 치사함을 견뎌내는 아버지들에겐 모두 '새끼'들이 딸려 있었고, 아버지들의 소망과 달리, 그 새끼들 역시 치사하게 살아가며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를 대물림받는 중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박범신의 '소금'은 아버지를 너무나 아프게 그려내서 처음에는 눈물이 나지만 중반부를 넘기면 저열하다는 생각이 든다. 등골 빼먹는 가족이 있을 수는 있지만 이 소설에서처럼 모든 아버지들이 아픔을 가지고 있고 가족들은 그의 고혈을 짜내고만 있는건 아니다. 그렇기에 이 극단적인 소설이 주는 거북함이 불편하다.
"그래서 만나게 된다면, 이 말만은 하고 싶어요. 아버지가 아버지이기 이전에, 선명우 씨로서..... 그냥 사람이었다는거..... 너무 늦게 알아차려 죄송하다고요."
가난하게 자라면서 온 가족에게 빨대 빨리기 위해 공부해야했던 선명우는 가족의 기대를 저버리지 못하고 오로지 희생만 한다. 사랑하는 이와도 헤어지고 온 가족의 소비를 책임지는 생활만을 해오던 선명우. 어느 날, 시한부를 선고받고 돌아오는 길 우연찮게 뺑소니를 목격하게 되고 무엇에 홀린 것처럼 피해차량의 운전자 행세를 하기 시작한다.. 한 순간에 와이프와 세 딸을 버리고 시골 소금장수로의 삶을 살아간다.
"인생엔 두개의 단 맛이 있어 하나의 단맛은 자본주의적 세계가 퍼뜨린 바이러스에 감염된 상태에서 빨대로 빠는 소비의 단맛이고, 다른 하나는 참된 자유를 얻어 몸과 영혼으로 느끼는 해방감의 단맛이야."
그런 선명우는 소금장수 이전의 자신을 빨대로 규정한다. 자본주의의 마수에 걸려 죽는 그 순간까지 모든 걸 빨아 먹히는 자신이자 모든 아버지들. 더 좋은 것, 더 많은 소비를 위해 죽을 때까지 일하는 그는, 염전에서 마지막까지 자신의 성공을 위해 피눈물 흘렸던 그의 아버지를 닮았다.
"너는 오직 공부만 해라!"하던 그 눈빛, 먼 길을 걸어서 찾아갔을 때 대파 자루로 사정없이 후려치면서 "오늘 방 우리, 다 죽자!" 하던 순간의 그 살기 띤 그 눈빛. 눈물로 번질번질하던 눈 속의 그 불덩어리야말로 그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진짜 모습이었다. 거기엔 가난으로 대를 물려온 모든 정한, 모든 분노, 모든 욕망이 담겨 있었다. 어찌 아버지뿐이랴. 그것은 아버지 같은 아버지 1, 아버지 2, 아버지 3....., 아버지 100....., 아버지 1000...... 의 얼굴이기도 했다.
선명우가 자신의 삶 대신 빨대로서의 삶을 살아간 것은 그의 아버지와 같았다. 어서 공부해서 이 지겨운 인생에서 우리 모두를 구원하라고 외치는 그의 아버지의 목소리는 과연 사랑이었을까, 구조요청이었을까.
"아, 달고 시고 쓰고 짠 눈물이여
어디에서 와 어디로 흐르는가
당신이 떠나고 나는 혼자 걸었네
먼 강의 흰 물소리 가슴에 사무치고
나는 깨닫네 사는 건 먼 눈물이 오가는 길
그리움을 눈물로 씻어 푸르게 될 때까지
사는 건 저문 강 나직나직 흘러가는 일
아, 달고 시고 쓰고 짠 눈물이여."
-- 선명우의 마지막 자작곡, <눈물>
치사한 아버지는 대물림된다. 이 지긋지긋한 염전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누구나 품고있는 가슴속 시인을 떠올리는 것이다. 가슴속 시인을 불러내 자기의 노래를 부를 때 진짜 자기의 삶을 살아간다는 걸, 박범신 작가는 말하고 싶어 했다. 그래도, 소금이 주는 광기 어린 거부는 너무 나간게 아닌가 싶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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