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멸망했다. 이땅에 태어나 지구를 갉아먹으며 문명의 바벨탑을 세우던 인류는 핵전쟁과 함께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렸다. 이 핵전쟁은 지구 전체를 덮친 듯, 미국도 이탈리아도 독일도 모두 무너져 내렸다. 러시아에서는 고작 몇만의 인류만이 촘촘한 지하철을 피난처 삼아 겨우 명맥을 이었으나 그것은 이미 짐승에 가까운 형태였다. 겨우 역 한 개, 한 개가 국가의 흉내를 내고 있을 뿐이다. 방사능으로 인해 거대해진 쥐떼의 습격이나 가스가 나갈 곳 없는 지하철에서의 작은 화재는 한 개 역(국가)을 초토화 시킬 수 있다. 나약한 호모사피엔스들은 겨우겨우 버섯과 이끼, 지상에서 가져 온 비타민제로 연명한다.
번화가, 웅대한 건물, 후덥지근한 여름에 머리카락을 날리고 얼굴을 스치는 그 상쾌한 바람이 있는 세상으로 다시는 가지 못할거야. 하늘도 결코 이전 같지 않을거야. 이젠 썩어가는 도관이 지나가고 위로 치솟은 이랑 모양의 터널 천장이 하늘이야. 앞으로도 그럴거야. 이 하늘이 이전 하늘과 같을까? 쪽빛일까? 깨끗할까?
이 소설이 단순하게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 생존해 나가는 인류를 그렸다면 아무리 좋은 소설이라도 월드워Z 정도에서 그쳤을 터이다. 그러나 이 소설을 SF 장르물로만 바라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아르티움은 헌터라는 용사에게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고 메트로의 중심지로 가게 된다.
아르티움이 헌터의 부탁을 수락한 것이 이 여행의 첫 걸음이었다면 그 다음 사건들, 곧 리가로 간 것과 거기서 부르봉을 만난 것이 두 번째 걸음이었다. 그 다음은 수하레프에 남아 있을 수도 있었는데 칸을 따라 나선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칸이 생각한 명분에 휩쓸렸다고 볼 수도 있었다. 그 다음에 아르티움은 파시스트한테 잡혔다. 하마터면 교수형 당할 뻔했으나 바로 그날 트베르를 기습한 여단 덕분에 구출되었다. 정말 우연의 일치였다.
여러 역들을 지나는 아르티움에게는 여러가지 기현상들이 일어나는데 괴물이라기 보다는 영적인 형태에 가까운 일들은 평범한 SF와는 다르다. 수도로 떠나는 여행은 21세기의 천로역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정신적인 수도를 동반한다. 오히려 괴물과의 싸움보다는 보이지 않는 공포, 무언지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한 환각 속에서 아르티움은 점점 성장한다.
후에, 아르티움의 고향 베덴하움이 낮선 이들에게 공격을 받고 이들을 구하기 위해 지상의 미사일 기지에서 미사일로 낮선 검은 존재들에게 미사일을 발사하는데, 이 때 아르티움은 깨닫는다. 자신에게 가해진 정신공격이 사실은 검은 존재들이 텔레파시를 보내는 것이라는 걸. 이들은 진화한 새 인류고 너무나 강력해 대부분의 인간은 미쳐버린 다는 것을. 다음 세대를 이어갈 신인류를 다시 구인류의 미사일이 파괴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소설은 막을 내린다.
'열수레의 책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식탁 위의 한국사' - 오래 된 것이 아니라 지금 대중이 먹는 것이 한식이다. (0) | 2022.04.25 |
---|---|
'경솔한 여행자' - 시간 여행 패러독스 (0) | 2022.04.22 |
'당신 자신이 되라' -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보는 마음경영 (0) | 2022.03.19 |
'럼두들 등반기' - 유통기한 지난 전설의 유머 (0) | 2022.03.09 |
'소금' - 치사한 아버지의 대물림 (0) | 2022.0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