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야 타임슬립 이야기가 차고도 넘쳐서 타임 패러독스라는 용어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익숙하다. 이 간단한 논리적 모순을 헤쳐나갈 방어 도구 없이는 아무리 장르물이라 해도 진정성을 의심받는 게 요즘의 타임슬립 물이다. 그런데 도대체 1944년, 식민지 조선이 해방되기 전 해에 출간된 이 소설이 가진 그로테스키함과 과학적 혜안은 믿기지 않을 정도다.
피에르는 자기 조상이 아내를 맞이해 아이를 가질 시간을 갖기도 전에 그를 죽였다. 그러니 피에르는 사라졌고, 그건 당연하다. 그는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지 않았다. 피에르 생느무는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좋다. 하지만 만일 피에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존재한 적도 없다면, 자신의 조상을 죽일 수도 없었던 것 아닌가!
이 소설은 타임 슬립을 다루고 있다. 우연찮게 어떤 물질을 발견하고 시공간을 넘나들게 된 피에르가 조금씩 미래로 가보다가(처음에는 연구목적이었다) 2054년 인류에게 큰 재앙이 일어난 것을 발견한다. 이 소설의 전작인 '대재난'의 배경인데 어느 날 갑자기 인류에게 전기에너지가 사라진다는 설정이다. 믿기지 않지만 이 설정이 1943년, 태평양전쟁이 한창인 시절에 프랑스 작가의 머릿속에서 나온 아이디어다. 아무튼 그 재난에 충격을 받은 피에르는 더욱더 먼 미래로 향하다 종국에는 10만 년 후까지 들여다보는데...
10만 년 후 인류의 모습은 참으로 이상하다. 2054년 전기에너지가 사라지면서 새로운 영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했고 그들에 의해 조금씩 인류는 자아를 잃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변모한다. 농사를 짓는 인간은 앞발만이 발달한 형태로, 전투를 담당하는 인간은 전투만을 하도록 신체와 정신이 개조되어 있다. 개개인의 역할과 개성은 사라지고 전체를 위한 한 부품이 되어버린 이 생명체를 인간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시대적 배경을 생각하면서 소설을 읽어보면 파시즘에 대한 통렬한 경고가 아닐는지.
무려 반백년 전의 작품이지만 경쾌함과 조롱, 풍자는 현대의 그 어느 소설 못지 않다. 그 모든 걸 차치하고 나서라도 재미가 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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