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이런 작가가 있는지 처음 알았다. 해양 소설이라는 장르가 있는지도 처음 알았고 심지어 해양문학상이라는 시상식까지 정기적으로 있다니... 일반적인 소설에 비해 배경이 협소하다 보니 전체적인 플로우가 투박하지만, 배와 항해, 위험과 모험이 집약되어 있는 바다의 모습은 남자라면 누구나 흥미를 가질 만하다..
‘남극해’는 만선의 꿈을 꾸며 메로(남극이빨고기)를 건지러 남극으로 향하는 ‘피닉스’호와 승선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원양어선이 위험하다고는 알고 있지만 남극은 일반적인 원양의 범주를 넘어선다. 추위를 비롯해 유빙과 폭풍, 극지에서 만나게 되는 자연의 위협은 일반적인 바다보다 한 차원 높다. 게다가 남극은 아무나 조업을 할 수도 없는 보호 구역. 이 소설을 통해 우리는 국제적인 보호단체가 어떻게 조업을 규제하고, 어떻게 환경을 지키는지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사람은 저마다 삶의 모양이 있다. 세상의 사람이 제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처럼 삶의 모습도 여러 모양이다. 오랫동안 승선했지만 선장이 될 수 없다는 절망이 꿈도 빼앗아 갔다. 사리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서 승선 계약을 제대로 마치는 배가 없었고 실망한 애인마저 떠나갔다. 그때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선택한 배가 피닉스 호였다. 피닉스 호의 항해가 남극해이었기 때문이다. 1 항사는 남극해에서 자신을 정화시키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 마음속 깊은 곳에는 남극해에서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고 싶은 마음이 더 컸는지도 모른다.
이야기는 오랜만에 배에 오른 박 기관장을 중심으로 펼쳐지지만 정작 박 기관장은 관찰자에 불과하다. 나름의 성공을 뒤로하고 전재산을 쓸어 넣어 남극으로 향한 박사장이나 그 밑에서 베테랑의 모습을 보이는 장 선장, 그리고 수많은 선원들은 각기 다른 사연을 가지고 이 먼 남극까지 왔다. 이 숨 막히는 고독 속에서 나름 삼겹살 파티도 하고 만선으로 배도 가득 채우지만, 세상과 단절된 이 작은 사회는 팽팽한 긴장감을 놓지 않는다. 조금만 방심해도 손가락이 낚싯줄에 잘려 나가고, 선원의 갈등은 살인으로도 이어진다. 한 국적의 선원들로 팀을 짜지 않는다는 작가의 설명이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소설의 마지막, 만선을 채우고도 화재로 불타는 피닉스 호는 인간 사회가 얼마나 허망한 자본주의를 추구하는지를 보여 준다. 그 위험 속에서도 불나방처럼 조업으로 뛰어드는 뱃사람들의 모습은 현실의 극단적인 자본주의를 보여주는 모습이기도 하다.
부이 라인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긴장한 채 쉽게 감겨들지 않았다. 부이 라인과 와인딩 드럼의 마찰열로 흰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녹이 돈키로 물을 뿌려 주며 마찰력을 줄이는 동안 장 선장은 피닉스 호 뱃머리를 바람 방향으로 돌려세웠다.. 피닉스호가 받는 풍압을 조금이라도 적게 해서 부이 줄과 앙카의 각을 수직으로 만들어 와인딩 드럼에 걸리는 장력을 줄이기 위한 조타였다.
스토리만 보면 그다지 특별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여기에 고도의 전문성, 그것도 쉽게 알지 못하는 먼바다와 배의 세계를 담고 있어 지루하지 않다. 내용은 쉽게, 팩트는 지극히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작가의 재능이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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