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소에 갇힌 소녀가 쓴 일기가 전 세계의 주목을 받은 건, 시대의 아픔을 기록했다는 이유만은 아니다. 어린 소녀가 가진 평범한 희망이 안타까운 비극으로 끝난 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이 글이 가진 진정성이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안네의 일기‘를 찾게 만든다. 나치의 시대는 끝났지만 지구상에는 아직도 비극이 이어지고 있는 곳들이 있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안타까운 곳이 북한이다. 독재 아래서 어려운 생활을 하는 걸로 모자라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성마저 갈갈이 찢어진 곳. 무엇을 생각하건 그 이상인 곳이 북한이다. 이 책이 비록 실화는 아니지만 이성아 작가의 치밀한 조사로 현실을 그림같이 그려낸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면서 세명의 화자를 통해 북한의 현실을 르포처럼 다루고 있다. 특이한 것은 화자의 시선이 주일 조선인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전후 일본에서 차별받던 이들이 북한으로 귀국하면서 일어난 반백년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한 번의 희망조차 꿈꾸지 못했다는 점에서 ’안네의 일기‘보다 더 가혹하고 비참하다.
먼저, 이야기의 중심축에 있는 미오. 재일 조선인으로 일본에서 차별을 이겨내고 나름 의사까지 된 인물이다. 조총련의 간부였던 아버지가 당에서 미움을 받는 바람에 북으로 가지 못하는데, 나중에는 구호의 목적으로 북한을 방문한다. 그리고 화자. 젊은 시절 북송에 앞장섰던 열혈 조총련계 조선족으로 후에 북한의 진실을 안 후 죽을 때까지 죄책감에 시달린다. 마지막으로 소라. 이야기의 가장 중심에 있는 인물이다. 중학 시절 화자와 오빠의 민족주의 사관으로 온 가족이 북송된 인물이다.
“속았다!”
“오나지데스(똑같아요)”
어머니는 왜 '구와사레타'(속았다)라고 하지 않고 '오나지데스'라고 했을까. 내 어깨에 놓여 있던 어머니의 두 손이 움찔하더니 내 어깨를 꽉 움켜잡았다. 뱃전에 모인 사람들은 일시에 고압 전류가 흐른 것 같이 완전히 얼어붙었다.
북한이 허상이었다는 걸 알아차리는데 긴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배에서 바라본 북한의 항구는 이미 획일적이고 무채색에 가까워 그들은 속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고, 도착한 후에는 더욱 가혹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의 짧은 시 형식인 하이쿠를 사랑하던 소녀는 죽는 그 순간까지 인간다움에 대한 갈망을 잊지 않았다. 정신 개조, 아오지 탄광, 가족들의 무너짐, 장마당, 고난의 행군까지.. 근현대 북한을 모두 겪어 나가면서 소라는 무너져간다. 그럼에도 어린 시절 겪은 짧은 아름다움을 잊지 못하는 소라의 모습은 안네의 희망만큼이나 읽는 이를 힘들게 한다. 북한의 실상을 여러 매체를 통해 접했지만 이 소설이 더 사실적이기에 더욱 고통스럽다.
일본의 낚시 방법 중에 가마우지의 목에 밧줄을 매어 물고기를 잡아오게 시키는 방법이 있다고 한다. 북한의 주민들이 이렇지 않을까. 자유를 모두 빼앗긴 채 물고기를 사냥하지만 자기들의 입에는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는 가마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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