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솔로지는 그리스어 안솔로기아, 꽃다발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짧은 명작들을 모아서 제공하는 것. 출판에서는 명작집을 말한다. 장르문학을 주로 다루는 ‘안전가옥’ 프로덕션에서 2018년 ‘대멸종’을 주제로 단편을 공모했는데 그중 다섯 편을 선발했다. 지구의 멸종으로 덩달아 사라질 운명을 맞은 저승의 이야기 <저승 최후의 날에 대한 기록>, 이 세상이 하나의 프로그램이라는 사실을 알아낸 어느 IT 개발자의 버그 해결을 담은 <세상을 끝내는 데 필요한 점프의 횟수>는 익숙한 모티브를 색다른 이야기로 풀어낸다.
인류가 안 없어지면, 지구에 여섯 번째 대멸종이 온다고 했어.
<선택의 아이>는 꽤나 염세적인데 인류의 구원이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나 옳지 않은 선택의 결과물일 수도 있다는 물음표를 던진다. <우주탐사선 베르티아>에서는 가이아 이론을 토대로 지구의 자살을 그려낸 작가도 있다. 마지막, <달을 불렀어, 귀를 기울여줘>는 독특하게도 판타지다. 마법과 검의 세계 역시 대멸종의 주제를 피해가지는 못했다. 마계에서 달을 불러내다니, 참으로 인간다운 종말이 아닐 수 없다.
대부분의 작품이 주제를 다루는 방식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이제 인류의 어리석음이 불러오는 종말은 식상한 지 우연과 어이없는 방식으로 종말이 찾아온다. 때로는 한 개인의 실수로, 때로는 아무 이유도 없이. 종말은 장르물의 단골 소재였지만 시대에 따라 방식이 조금씩 변한다. 과학이 급격하게 발전하던 90년대는 인류가 만들어낸 기계문명이 지구 종말의 원인이었다. 그러다, 환경 파괴가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불러내더니 이제는 이유 없는 멸종을 다루고 있다. 어쩌면 <우주탐사선 베르티아>처럼 지구가 조금씩 우울증에 빠지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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