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지금까지 읽은 소설 중 가장 재미있었던 소설이 무엇이었냐 누군가 묻는다면, 이 <영원한 제국>을 꼽는다. 장르적인 느낌이 녹아있기도 해서 순문학 사이에서는 조금 아웃사이더로 평가되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이렇게 재밌는 소설은 보지 못했다. 이제 너무 많이 읽어 책이 닳아 빠졌고 처음보다는 충격이나 감탄또한 줄었지만 볼 때마다 빠져드는 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책 판본 자체가 옛 것이어서 약간의 곰팡이 냄새까지 아주 제대로였다.
이 소설은 실제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아닐 가능성이 훨씬 높을 순 있지만, 저자는 머릿말을 통해 이 글의 출처가 취성록이라는 고 기록에서 차용한 것이라 밝혔다. 취성록이 진본인 경우엔 대단한 진실 하나를,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기가막힌 야사 하나를 얻게 되는 것이니 결코 손해는 아니다. 1800년 1월, 개혁군주 정조의 치세 중 하루 밤낮을 다루고 있는 이 글에서 우리는 마치 거기 있었던 것처럼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이 글이 현대인의 창작이 아닌 당시 인물의 창작 혹은 기록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이인몽이라는 29살의 젊고 강직한 선비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이인몽과 함께 당직을 서던 장종오라는 인물이 급사한다. 단순히 죽은 것이 아니라 <시경전견록고>라는 공책을 남기고 죽었으며 이 책의 원전이라 할 수 있는 <시경천견록>은 사라져 버린다. 정조는 이인몽에게 이 두 글이 매우 중요한 선대왕의 기록임을 알리고 찾아올 것을 명령하지만 이미 두 책은 사라져 버린 상태. 이와 함께 또 하나의 죽음이 나오는데 바로 전임 영의정, 채제공의 장자 채이숙이 서학쟁이로 몰려 옥사한 것이다. 이인몽의 친한 선배이기도 한 정약용은 그를 살리려 애를 쓰지만 절명하고 채이숙은 현장에서 치료를 돕던 현승헌을 약용으로 잘못알고 유지를 남긴다. 내용은 "선대왕 마마의 금등지사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여기서 선대왕의 금등지사라는 표현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이 소설의 핵심이다. 금등지사라 함은 고사에서 유래한 말로 금 서류함 안의 서류라는 뜻으로 아주 중요한 옛 기록을 의미한다. 과거 주나라의 성왕이 주공을 용서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하는데, 아무튼 무지 중요한 비밀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현대식으로 이야기 하자면 비망록 정도가 되겠다. 아무튼 선대왕의 금등지사라 함은 영조의 기록을 의미한다. 영조와 정조의 사이에는 비운의 인물이 하나 있는데 바로 사도세자이다. 사실 이 시기는 붕당 정치로 인해 노론과 남인이 끝장대결을 펼치던 시기이다. 인현왕후, 영조의 편에 선 노론이 득세하고 있지만 이들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여하고 있다. 당연히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를 보는 눈이 고울리 없다. 거기에 노론이 주창하고 있는 주자학은 사대부 중심의 정치 이념이기도 하다. 반면 세력은 약하지만 강력한 왕권으로의 복귀를 원하는 남인들로는 정약용 같은 인물들이 있으며 이들은 정조와 함께 노론을 없애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한다. 당연히 사도세자의 죽읨의 원인을 노론쪽으로 몰고 갈 필요가 있다.
선대왕마마의 금등지사는 곧, 사도세자에 대한 영조의 마음이 담겨 있는 글인 것이다. 이 글의 내용에 따라, 노론은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이 작품은 단순히 비명횡사한 사도세자의 죽음을 통해 두 붕당의 대립을 그리는 야사가 아니라, 두개의 정치적 이념이 충돌하는 한복판을 그려낸 작품이다. 단순히 추리, 미스터리의 영역을 넘어선 역사적 배경을 담고 있어 문체반정이라던지, 주자학과 유교의 이념대립, 서학 배척, 화성행궁 축성 이유 등에 대한 이야기나, 당시 선비들의 일하는 방식까지 세밀하게 전달하고 있다.
사실 이 책의 결론은 정해져 있다. 정조는 그의 개혁을 성공하지 못한채 죽고, 순조가 그 뒤를 잇는다.1 한마디로 정조 이후 조선왕조는 내리막길인 것이다. 2
이 책이 단순한 가상역사소설의 범주를 넘어서는 건, 죽음과 금등지사라는 자극적인 야사만 담아낸 것이 아니라 이렇게 당시 정치이념의 대립과 시대상을 정확히 전달하면서도, 이인몽이라는 인물을 통한 소설적 긴박감을 잃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모든 것이 노론을 밀어내기 위해 정조가 꾸민 일이라는 점이 드러날 때에는 숨이 멎는다.
그러나 실제로 금등지사는 존재하였으며 이것이 정조에게 전달되었더라면 역사는 완전히 바뀌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인몽은 금등지사를 전달하지 못한 채 시골 촌부로 신세를 한탄하며 살아가다가 하나의 기록을 말년에 남기게 되고 이인화 작가의 손을 빌려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선대왕마마의 금등지사는?
시경 빈풍편에 등장하는 시로, 사도세자에 대한 영조의 상황과 너무도 흡사하다.
또한, 당시에는 부시라고 하는 것이 있었는데 외교시, 직설적으로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시경에 수록된 300여편의 글로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는 기법이다. 영조는 부시를 통해 금등지사를 남긴 것이다.
鴟鴞鴟鴞(치효치효) : 올빼미여, 올빼미여
旣取我子(기취아자) : 이미 내 새끼 잡아먹었으니
無毁我室(무훼아실) : 우리 집안 허물지
말라
恩斯勤斯(은사근사) : 정성을 다하고 노력을 다했다
鬻子之閔斯(죽자지민사) : 어린 자식
불쌍하다
迨天之未陰雨(태천지미음우) : 비가 내리기전에
徹彼桑土(철피상토) : 저 뽕나무 밭에서 뽕 뿌리
캐어다가
綢繆牖戶(주무유호) : 창과 문을 얽어놓으면
今女下民(금녀하민) : 이제 너의 낮은 백성들이
或敢侮予(혹감모여) :
감히 나를 모욕할까
予手拮据(여수길거) : 내손이 다 닳도록
予所捋荼(여소랄도) : 갈대 이삭 뽑아오고
予所蓄租(여소축조) :
띠 풀 모아 쌓았도다.
予口卒瘏(여구졸도) : 내 입이 병난 것은
曰予未有室家(왈여미유실가) : 내게 집이 없기
때문이다.
予羽譙譙(여우초초) : 나의 날개 깃 다 느려지고
予尾翛翛(여미소소) : 내 꼬리 다 숙여져
予室翹翹(여실교교) :
내 집도 위태하다
風雨所漂搖(풍우소표요) : 비바람에 흔들려
予維音嘵嘵(여유음효효) : 내 울음소리 떨린다
PS. 안성기를 주연으로 한 영화가 만들어 졌지만,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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