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학번인 나는 소위 말하는 ‘운동권‘과는 거리가 있다. 98년은 이미 비운동권 학생회들이 당선 되고 있는 시기였고, 문선도 1학기 때 잠깐 배운 게 다였다. 4년 대학생활 동안 플래카드 한번 들어본 적 없었으며, 일부 시위를 하는 친구들의 경우도 대부분 등록금과 같은 현실적인 문제였지, 이념과 사상의 움직임은 아니었다. 때문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관념은 80년대의 반공교육을 받은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었고 그나마 태백산맥 같은 소설을 통해서 조금씩이나마 다른 관점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 배경에서 봤을 때 29년생 지성인이 들려주는 <대화>가 21세기에 더욱 신선하게 다가온다.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배경지식이 적더라도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신문기자 출신인 리영희 선생인지라 사상과 이념과 같은 난해한 이야기도 이토록 쉽게 풀어 쓸 수 있었으리라.
1929년에 북에서 태어난 리영희 선생은 경성에 유학하는 수재였다. 6.25에 징집되어 통역장교로 7년을 복무한 뒤 합동통신을 거쳐 조선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했다. 지성인으로서의 양심으로 당시 위정자들의 눈 밖에 날만한 글들을 끊임없이 써내려간 탓에 기자생활을 길게 하지 못했으며 후에는 한양대학교 교수로 생활한다. <우상과 이성>을 비롯해 <전환시대의 논리>와 같은 책을 집필하였으며 특히 <전환시대의 논리> 같은 경우에는 학생들의 세상을 보는 인식을 바꾸는 큰 계기가 되었던 책으로, 최근 히트한 <변호인>에도 등장한다. 이 책은 99년도 말 연대생들이 뽑은 20세기 인문과학 분야에 영향을 끼친 저작 1위에 선정되기도 한다.
리영희 선생은 이승만을 거쳐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독재화, 산업화의 한 가운데를 날카로운 펜 한 자루로 뚫고 살았다. 이 글은 77세에 발간된 글로 중앙대 임헌영 교수와의 대담형식을 빌렸다. 질문을 주고 받는 형태인 만큼 일반적인 글보다 이해가 쉽다. 대다수의 내용과 뉘앙스에서 반미성향을 강하게 드러내고 사회주의에 대한 애착을 볼 수 있는데, 대한민국의 사회문제의 원인으로 친일 청산 없는 반공이념의 도입으로 보고 있으며 미국의 패권주의에 의한 피해자로서 한국을 보고 있다. 800페이지에 가까운 장문이지만, 대한민국 최고 지성 한사람의 일생을 담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읽고 난 후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인간은 누구나, 더욱이 진정한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인 까닭에 자기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정에 대해서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사회’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고 믿는다. 이 이념에 따라, 나는 언제나 내 앞에 던져진 현실 상황을 묵인하거나 회피하거나 또는 상황과의 관계설정을 기권으로 얼버무리는 태도를 ‘지식인’의 배신으로 경멸하고 경계했다. 사회에 대한 배신일 뿐 아니라 그에 앞서 자신에 대한 배신이라고 여겨왔다.
이 책에 실린 여러 가지 주장에 있어서는 아직까지도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미국의 패권주의, 미국식 시장경제와 무한 경쟁, 국가 권력의 거대화 등에 대한 인식은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고문과 안기부는 없지만 아직 국가권력은 개인보다 위에서 군림하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 리영희 선생의 글이 더욱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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