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예쁘게 기억했던 친구의 얼굴이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는데 대부분 기억의 왜곡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아름답게 기억하게 되는 것과 같은 원리인데 나에게는 퇴마록도 이런 왜곡된 기억 중 하나이다. 밤을 새면서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며 보았던 소설이지만, 이제 와서 보면 유치하기 그지 없다는 말이다.
93년 초보 글쟁이로 하이텔로 데뷔한 이우혁은 20년이 지난 지금 골수팬들을 거느린 중견의 장르작가가 되어 있고 퇴마록은 전설의 한국판타지로 남아 있다. 그런 퇴마록의 외전이 2013년 발간될 때 꽤나 많은 사람이 설렜으리라.
굵직한 모험이 아닌 소소한 5가지 에피소드가 실린 외전에 실망한 사람도 꽤나 있었겠지만 그래도 20년만에 들어보는 현암과 준후, 승희의 이름은 무척이나 반갑다. 다만, 그 수준이 문제이긴 하지만..
준후와 현암이 박신부의 집에서 퇴마행을 시작하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그들이 살아가는 법>, 악플러들을 겨냥한 <보이지 않는 적>, <준후의 학교기행>, 현암과 승희의 데이트 <짐 들어주는 이야기> 등 네 편과 주기선생의 이야기를 담은 <생령 살인>까지의 다섯 편이 실려 있지만 눈에 띄는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스토리는 차치하더라도 팬픽으로 의심될 정도의 문장력은 20년을 작가로 살아온 이의 글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지경이다. 이우혁이 문장력이 뛰어난 작가는 아니라지만, 치우천황기와 바이퍼케이션 같은 최근작에 비하면 너무나 엉성하다.특히 예전 퇴마록의 뒤편에 실려 있던 단편들에서도 상당한 능력을 보여주었던 바, 이번 외전은 너무나 실망스럽다.
개인적으로 이번 외전은 억지로 쓰여진게 아닌가 싶을 정도인데, 그 흔한 머리말이나 추천사 한 장 없는 것으로 보면 출판사와의 계약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우혁이라는 작가를 지금 이 자리에 있도록 만들어준 작품의 외전을 20년만에 내면서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한마디쯤은 있을 법도 한데 말이다. 퇴마록에 얽힌 내 추억이 계속해서 아름답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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