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대한민국은 도민준이라는 독감에 걸렸다. 드라마가 히트 할 때마다 늘 주인공은 이슈의 중심에 있었지만, 이번엔 더욱 특별해 보인다. 불로장생 외계인이라는 캐릭터로 여성뿐 아니라 남성들의 마음까지 휘어잡았기 때문이다. 대체 도민준의 매력포인트는 뭐길래 이런 일이 일어난걸까. 도도한 말투? 잘 생긴 외모? 초능력? 그 모든 것이 복합적인 매력요인이겠지만, 그 중에서도 존재의 시간을 빼 놓고는 도민준을 말할 수 없다. 인간의 수명을 뛰어넘어 역사를 관조할 수 있는 지적 생명체의 존재는 이성적인 매력을 넘어 상상력의 유희를 제공해 남자가 아닌 캐릭터로서의 매력을 더욱 드러낸다.(물론 수컷냄새도 장난 아니지만) 오래 전부터 인간은 불멸, 오래 사는 것에 대한 관심을 여러 예술작품을 통해 표현하고 있는데 그런 원초적인 호기심과 갈망을 채워 준 캐릭터가 바로 별그대의 성공 요인이다. 이렇듯, 예나 지금이나 불멸이라는 주제는 대중들에게 먹히는(?) 소재다. 따라서 극한의 상상력을 기반으로 해 원초적인 재미를 이끌어 내는 판타지라는 장르에서 20여 년 전에 이미 불멸의 존재가 등장한 소설이 있다는 것이 별로 놀랍지 않다. 바로 <불멸의 기사>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주인공은 기사이며 특별한 이유로 불멸의 몸을 지니게 된다. 일반적으로상상하듯이 불멸의 몸을 가진데다 착하기까지 한(혹은 거칠지만 마음만은 따뜻한? 그 어느쪽이건) 주인공이 전국을 통일해 나가거나 사랑을 찾아 헤메이는 유치한 소설은 아니다. 오히려 일반적인 장르물에서는 절대로 보기 힘든 정도 수준의 악한 행위를 태연하게 저지르는 주인공과 잔인함은 독특하기 그지 없으며 추리소설을 연상케 하는 구조로 상투적이거나 유치해질 수 있는 판타지 소설에 긴장감을 불어 넣었다. 거기에 마법을 완전히 배제한 채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한 중세물을 표방한 것도 큰 특징이다. 대학 때 통신연재를 통해 쓴 글임을 생각하면 꽤나 재능 있는 작가다.
이 글은 크게 2부작이다. 카라얀이라는 가상 국가의 용맹한 기사, 얀 지스카드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는 1부는 주인공이 한 마을을 학살하는 장면에서 출발한다. 왕의 명령에 따라 일반 시민까지도 철저하게 학살하는 얀은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자다. 자신이 돌보던 어린아이를 가족과 함께 처형하고, 한 마을을 산채로 생매장하기도 하는 등 선악의 기준이 없이 오로지 자신과 가문만을 생각하며 그 성격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다. 그렇게 행동하는 데에는 출생의 비밀과 연관되어 있기는 하지만 숨겨진 이유도 용서가 되지 않는다.
아무튼 권력의 중심에 서있는 얀은 휴전한 적국 루벤후트로 시집가는 시에나 공주를 호송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호송길에 들른 얀의 영지에서 다른 영주와 무력충돌이 일어날 뻔 하지만 시에나의 기지로 무사히 해결한다. 다만 이 과정에서 시에나의 의도와는 달리 수많은 농노들이 얀에 의해 이교도로 몰려 무고하게 처형된다. 이후 얀을 증오하게 된 시에나는 자신이 결혼한 루벤후트의 온 힘을 빌어 얀을 제거 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냉혹한 사회를 겪을수록 얀의 순수함을 이해하게 된 시에나는 혼란스럽다. 이후 시에나를 이용하려는 루벤후트의 손아귀에서 탈출한 얀과 시에나가 카라얀으로 무사히 귀환하지만 내부의 적들의 흉계에 빠져 얀은 죽고 시에나는 간신히 탈출한다.
천년 후. 얀과 시에나는 브리타니의 건국설화에 나오는 전설속의 영웅이다. 한창 시민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의 프랑스를 그대로 옮겨 놓은 브리타니. 흑인 노예 사브리나는 혁명으로 인해 원치 않은 자유를 얻는다. 거리를 방황하던 사브리나는 얀을 증오함과 동시에 불멸의 몸을 가진 데스틴을 만나 협상가의 길을 걷게 된다. 한편, 루이 16세의 총사대장으로서 살고 있던 얀은 데스틴을 설득해 나폴레옹의 얼굴과 루이 16세의 얼굴을 바꿔치기 하고 그 대가로 자신의 심장을 데스틴에게 내놓는다. 이후로 나폴레옹으로 변신한 루이의 천재적인 전략이 이어지지만 결국 시민들의 혁명은 실패하고 브리타니는 다시 왕정으로 복고한다.
2부에서 부터 저자는 그간 머리에 구상하고 있었던 것들을 풀어 놓는데 중구난방, 수습이 안 되는 지경에 이른다. 가짜 나폴레옹에 철가면, 얀이 활동하던 시기의 전설과 트라팔가 해전, 해적과 프랑스 혁명까지.. 관심있는 모든 것들을 풀어내는 팩션으로 급격하게 틀어진 장르는 좀처럼 제 궤도를 찾지 못한다. 루이 16세가 얀의 힘을 빌어 나폴레옹으로 재탄생 한다는 설정은 꽤나 참신하지만 들쭉날쭉한 스토리 전개는 1부의 필력이 한 때의 영광에 불과했음을 보여준다.
2부의 미숙에도 불구, 일반적인 판타지에 비해 주제의식도 명확하고, 바라보는 눈도 참신한 좋은 작품이다. 상당히 복잡한 주제를 나름대로 글 속에서 풀어내려 한 점이 행간에 묻어나는 데다 곳곳에 깔아놓은 투박한 복선들은 아마추어의 프로의식을 보여준다. 광기라는 주제로 시작해서 죽음으로 끝나는 꽤나 야심찬 플롯도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얀은 독자들에게 묻는다.
그것으로 좋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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