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수레의 책읽기

[28] 정유정이 꿈꾸는 인간없는 세상..요즘 같아서는 나도 꿈꾼다.

슬슬살살 2014. 5. 12. 23:48

 

주의: 다수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정유정은 압도적인 작가다. 문장에서, 서사에서, 이야기의 구조에서, 그녀의 텍스트는 영화 같다. 그 어떤 영화보다 더 영상미가 뛰어난 텍스트라니.. 그것이 가능한가 싶지만, 7년의 밤에 이어 내놓은 28로 증명해 냈다. 정유정. 그녀는 글로만 쓰여진 영화를 보여줄 수 있는 작가다.

 

이 글은 5명의 인간과 1마리의 개의 시점에서 단 하나의 사건을 서술해 나간다. 이러한 방식이 새로운 건 아니지만, 등장인물 모두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는 점, 사람이 아닌 개가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들이 색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읽는 이는 5명과 한 마리의 각기 다른 캐릭터로 괴질로 뒤덮인 도시의 한복판을 경험할 수 있다. 붉은 눈으로 시작되는 이 괴질이 화양이라는 가상의 도시를 습격하면서 <28>은 시작된다.

 

줄거리/등장인물

(1)   서재형: 11년 전 알래스카에서 분신처럼 아끼던 썰매 개들을 늑대 밥으로 던져주고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트라우마가 되어버린 그 사건을 가슴에 묻고 화양에서 수의사로 활동하지만, 스타와 쿠키로 이루어진 개들에게 또 다른 썰매 개를 꿈꾼다. 개와 사람이 함께 걸리는 괴질 때문에 몰살 위기에 처한 개들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11년 전과 마찬가지로 지켜내지 못한다. 개들로부터 아내를 잃은 한기준과 연인을 잃은 개, 링고와의 사투 가운데에서 숨진다.   

(2)   한기준: 소방대원. 끝까지 화양시의 소방대원으로서의 임무에 충실히 임한다. 그러나 정작 아내와 딸 유빈을 개떼들의 습격으로 잃는다. 화양 모든 개가 살처분 대상이 되면서 대부분의 개는 땅속으로 생매장 당하지만 그렇지 않은 개들은 인간을 습격한다. 한기준의 아내와 딸이 그 희생자 중 하나. 때문에, 이성을 잃고 개들과 대립하며 링고의 연인 스타를 죽이고, 링고의 복수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오히려 복수를 하지도, 받지도 못한 채 생존해 버린다. 아마도 살아남은 자의 고통을 가장 많이 가슴에 담고 살 인물이다.

(3)   김윤주: 기자. 쿠키의 원래 주인이던 박남철의 아들이 쿠키를 데려간 서재형에게 원한을 품고 김윤주에게 익명의 제보를 한다. 11년 전의 사건을 비롯해 몇 가지 제보가 서재형을 궁지로 몰아 넣는다. 찝찝한 기분에 서재형을 인터뷰하기 위해 화양을 찾았다가 질병으로 인해 고립된다. 기자의식을 발휘해 화양 내부의 소식을 외부로 전달하려 하지만, 모두 실패한다. 오히려 인수공통전염병이라는 사실만이 기사화돼 화양시의 개들이 몰살당하는데 일조한다. 꼭 세월호의 언론처럼 모든 언론은 정부의 입장만을 대변하고, 정작 현장에 있는 기자들의 이야기에는 귀를 닫는다. 서재형과 함께 지내면서 사랑에 빠지지만 끝내 연인을 잃는다. 한기준과 함께 최종 생존자.

(4)   박동해: 사이코패스 또는 소시오패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받은 학대로 개를 연쇄적으로 죽이면서 쾌감을 얻는다. 산속에서 아버지의 개 쿠키를 고문하다가 서재형에게 개를 빼앗긴다. 이후 서재형에게 앙심을 품고 김윤주에게 기사를 제보하는 한편 쿠키를 납치해 다시 범행을 저지르려 한다. 전염병이 화양을 뒤덮는 순간에도 박동해는 쿠키와 서재형에 대한 복수만을 노린다. 결국 자신을 학대해 오던 아버지를 죽게 만들지만 결국 링고에게 죽임을 당한다.

(5)   노수진: 간호사. 등장인물 중 가장 외곽에서 겉도는 인물. 마지막까지 환자들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오히려 무기력감만을 느낀다. 특전사인 쌍둥이 동생이 화양시로 투입되었지만 만나지 못한다. 다만 주변의 분위기로, 아버지와 동생 모두가 서로에 총을 겨누며 살아남지 못했으리라 짐작된다. 무간지옥으로 변한 화양시에서 결국 윤간을 당한 채 화양시를 빠져나가려는 시위대에 합류하고, 동생을 포함한 외곽군인들의 사격을 받는다.

(6)   링고: 투견. 인간으로부터 버림 당하고 투견으로 성장한다. 반은 늑대로, 야성과 투견으로서의 숙련도가 모두 뛰어난 명견이다. 서재형의 개 스타에게 애정을 품는다. 스타를 죽인 한기준에 복수하려 하지만 실패하고 오히려 자신을 보살펴 준 재형을 죽이고 총에 맞는다.

알 수 없는 괴질로 인한 디스토피아를 그린 작품은 수도 없이 많다. 하지만 괴질의 정체와 그에 대응하는 인간의 모습이 주가 아니라 재난을 만난 무간지옥에서의 인간의 모습을 그려냈다는 점에서는 <눈먼 자들의 도시>와 유사하다. 다만, <눈먼 자들의 도시>가 잔인한 해학이라면, <28>은 냉소와 몰인간성이다. 화양과 화양이 아닌 곳의 갈림은 화양이 아닌 곳의 인간을 잔인하게 만든다. 마찬가지로 개와 인간의 갈림은 반려견을 살처분 대상으로 격하시킨다.

 

마야. 부르며 눈을 떴을 때, 진짜 마야의 눈이 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고 했다. 무한한 신뢰와 애정이 담긴 다갈색 눈이 그에게 물어 왔다고 했다. “대장, 내 아이들을 어쨌어?”

 

마야의 자식들을 늑대 밥으로 던져주고 살아남은 재형의 기억이다. 이토록 생존 투쟁에서의 인간은 개보다 잔인하다. 주 등장인물들은 화양이라는 생지옥의 한복판을 헤쳐나가지만, 정작 그들을 위협하는 건 질병이 아니라 인간이다. 오히려 스타와 쿠키의 경우처럼 개들은 신뢰를 지킨다. 정유정은 아마도 인간이라는 생물에 대해 진저리가 나는지도 모르겠다. 특히나 세월호라는 참사 이후에 읽은 <28>이 인간의 몰염치를 더욱 부각시킨다. 특히나 살려달라는 화양시민의 절규에 화양봉쇄로 화답한 국가권력의 행태는 요즘의 작태를 연상케 한다. 서재형의 묘비에 새겨진 인간 없는 세상으로 가다라는 문구가 새삼스럽지 않다.

 


28

저자
정유정 지음
출판사
은행나무 | 2013-06-27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잔혹한 리얼리티 속에 숨겨진구원의 상징과 생존을 향한 뜨거운 갈...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