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수레의 책읽기

[파체] 아름다운 화성행궁을 둘러싼 세 남녀의 사랑

슬슬살살 2014. 7. 1. 23:19

 파체(破涕) VS 파체(Pace)

"파체(破涕)라는 말을 아느냐."
"어려운 말은 모르옵니다."
"눈물을 거두란 뜻이다. 슬픔을 끝애고 기쁨을 얻으란 뜻이니 내 오늘 너로 인하여 그 말의 뜻을 알겠다."

"제게도 한 뜻이 떠올랐나이다."
"무슨 뜻이련고?"
"먼 데 나라 말1로 그것은 평화를 부르는 말이라 하옵니다. 그 나라 그 백성들은 마음이 곤고할 때 하늘을 우러러, 우리에게 평화를 주옵소서, 하고 아뢴다 하나이다."

 

이규진 작가는 중의를 가진 단어인 파체를 제목으로 삼았다. 한글과 이탈리아어로 각각 위로와 평화를 뜻하는 말이니 제목만으로도 작품의 주제를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이규진 작가가 이러한 중의적인 표현들을 유난히 좋아하는 것은 화성행궁과 천주교리를 병렬 배치한 작중 내용에서도 쉽게 눈치 챌 수 있다. 이번 작품이 처녀작인지라 그 방식에 세련미가 떨어지기는 하지만 작가가 표현하고자 했던 간절함과 비밀스러움이 직관적으로 다가온다. 작가후기에도 나오지만 <파체>는 사랑과 평화를 다룬 작품이다.
 
제2의 정은궐이 탄생하려나
<성균관스캔들>과 <해를 품은 달>의 원작자로 퓨전 로맨스 사극의 일인자로 우뚝 선 정은궐. 이규진 작가가 바랄런지는 모르겠지만, <파체>에서 정은궐이 보인다. 남장여인, 미소년 노비, 삼각관계, 왕(세자)와의 연적관계 등은 이미 정은궐 작가로 인해 익숙해진 내용들이다. 당시의 말투를 일부러 무시하고 현대인 처럼 대사를 사용해 로맨스의 몰입도를 높이는 점도 닮았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다른 점은 무얼까. 아마 정조와 화성행궁, 천주교 박해와 같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비중이 높다는 것이 장점일 것이다. 댄 브라운식의 가벼운 음모론을 화성행궁에 담아낸 것은 사실 유무를 떠나서 읽는 이에게 찾아보고 싶게끔 만든다. (그래서 아래 따로 정리해 놓았다.) 정은궐의 달달한 로맨스와 팽팽한 인물관계설정을 따라가기에는 한참 부족하지만 기본적인 필력과 묘사의 기본기는 탄탄하다. 두번째 작품도 상당히 기대된다.

 

아무런 사건 없이 오로지 사랑만...(스포일러 있음)
파체에는 3명의 남자와 1명의 남장여인이 핵심인물이다. 화성행궁을 짓고자 하는 정조, 타고난 천재성으로 화성행궁을 실제로 지어낸 선비 태윤, 어릴적 죽은 오빠를 대신해 남장을 하고 왕의 호위무사로 살아가는 정연, 정연의 신비로운 노비 유겸을 중심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왕의 눈에 띈 태윤은 의욕적으로 화성공사를 해 나간다. 정연을 오빠인 정빈으로만 알고서 우정을 나누며 천주교인인 유겸과도 교류하며 믿음을 가지기도 한다. 서학(천주교)를 나라에서 금하고 있긴 하지만 정조도 눈감아주고 있으며 천주교의 교리를 화성 여기저기에 새겨나가기도 한다. 정연은 유겸에게 사랑을 넘어선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밝힐 수 없기에 더욱 안타깝다. 정조를 공격하는 노론벽파 일당과 세자의 죽음, 억지로 혼인한 정연의 아내 영신의 질투로 유겸이 관아에 잡혀가게 되고 태윤, 정연 역시 연루된다. 유겸이 정조의 숨겨진 아들 온이었음이 밝혀지면서 사건이 정리되는 듯 하지만 정조가 죽으면서 시작된 천주교의 대규모 박해를 피하지는 못한다. 정연과 유겸은 함께 죽음을 맞이하고 가까스로 살아난 태윤이 이들을 수습한다.

 

화성행궁과 천주교-실제의 모습
줄거리만 봐서는 삼류 로맨스 소설 같지만, 예쁜 문체(활자의 서체도 예쁘다)로 묘사된 화성행궁의 아름다움과 종교적인 신비함이 어우러져 훌륭한 작품이 되었다. 특히 화성행궁의 아름다움이 잘 묘사되어 있는데 당연히 사실이 아니다. 억지로 짜맞춘 이야기임을 알면서도 읽다보면 화성행궁의 실제모습이 무지하게 궁금해진다. 


  1. 화홍문의 무지개다리가 물로 벌하지 않겠다는 창조주의 증거를 상징하고 일곱개의 문은 일곱성사를 의미한다.


 

  2. 방화수류정 서쪽 벽면에서 빚나는 십자가 문양 86개, (개수의 의미는 책을 보자)

     실제로 정약용의 신앙을 나타내는 증거라는 말이 기독교계에 퍼져 있을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근거는 없다.

     그렇지만 아름다움으로는 행궁의 백미.


 


  3. 방화수류정 지붕의 십자모양: 하늘에서 내려다 보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는 각루와는 달리 십자가 모양이다.

 


4. 여장의 총구는 삼위일체를 상징?!, 옹성은 어머니의 태를 상징하며 성모의 마음을 나타냈다. 이쯤 되면 좀 억지스럽다.

 


5. 오성지는 다섯개의 별이 뜨는 연못. 예수가 탄생한 말구유와 동방박사, 요셉과 마리아를 상징하는 다섯개의 별.


 

6. 유겸이 태윤과 미사를 드리던 비밀 장소 동북공심돈. 실제는 아니겠지만 비밀스럽게 조성된 공간으로 보이기는 한다.


 

7. 마지막으로 태윤의 존재는 당연히 가상이고 실제로 화성을 지은 일등공신은 다들 알겠지만 정약용이다.
실제로 화성행궁과 십자가에 관련한 종교적인 떡밥들은 기독교계에서는 유명한 루머이다. 어쨌거나 아직까지 밝혀진 건 아무것도 없는 상태다.

 

태윤을 입을 빌어 이 글을 전하는 작가의 이야기

나는 내 이야기를 후일 오는 사람들이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도 있고, 몰랐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이 두 마음을 오가며 이 글을 썼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들을 적은 나의 마음은 진실하다.  -본문중에서

 

마지막을 함께 한 유겸과 정연의 사랑은 남녀사이의 애정을 넘어선 숭고한 느낌을 준다. 이 역시 진실하다. 로맨틱보다는 종교적인 숭고한 사랑이 어울리는 작품이다. 화성행궁과 종교적인 떡밥들을 연결하는 솜씨도 수준급이고, 특히나 종교와 남녀관계, 남장여인의 숙명 같은 진부한 소재들을 진부하지 않게 담아낸 것도 신선하다. 모자란 부분도 많지만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작가다. 그리고 작가가 바랬듯이 <파체>는 심심파적보다는 훨씬 괜찮은 작품이었다.

 


파체

저자
이규진 지음
출판사
책밭 | 2014-04-19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파체(破涕)-눈물을 거둬라, 파체(Pace)-평화를 주소서1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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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탈리아어, Pace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