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년 후에도 읽히는 절정의 낭만주의
책의 내용보다도 저자인 에밀리 브론테의 셋째 언니가 <제인 에어>의 샬런 브론테라는 사실이 더 흥미롭다. 동명의 드라마 때문인지 책의 제목이 주는 느낌이 현대적이면서 일일 연속극 스럽다. 물론 로맨스 소설이라면 차고 넘치지만, 이 책이 명작 반열에 올라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먼저 3대에 걸쳐 두 남녀의 격정적인 사랑을 능동적으로 담아낸 절정의 낭만주의 소설이라는게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읽히는 가장 큰 이유이다. 사랑이라는 영원불멸의 테마를 열정과 복수, 집착이라는 지극히 현대적인 소재로 담아냈는데 그 수준이 현대의 다른 소설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 오히려 <폭풍의 언덕>에는 지금의 작가들이 절대로 따를 수 없는 현장성을 가지고 있어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 위치가 공고해 질 것 같다.
◆ 3대에 걸친 사랑과 복수, 그리고 다시 사랑
이 정도로 복잡한 가계도는 <백년동안의 고독>이후 처음이다. 이 글은 제3자인 넬리라는 가정부가 또다른 제 3자인 작중의 '나(록우드)'에게 전달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어 현장감을 높인다. 진짜 가까운 이로부터 남의 이야기를 듣는 방식인데 이야기에 대한 몰입도를 높이는데 그만이다. 중간중간 '나'가 아프다는 이유를 들어 이야기를 강제적으로 종료시키곤 하는데 그런 작은 장치들 마저 히스클리프와 캐쉬의 사랑 이야기에 몰입하게 만드는 소품으로 훌륭하게 쓰인다.
언쇼 가문에 업둥이로 들어온 히스클리프는 의붓 형제인 힌들리 언쇼와는 앙숙이면서 캐서린 린튼과 사랑하는 관계다. 캐서린은 히스클리프를 사랑하지만 그 감정을 정확히 알아채기에는 너무 어린데다 가까이 사는 린튼 가문의 에드거 린튼의 귀족적인 모습에 끌리기까지 한다. 사소한 오해로 히스클리프는 집을 나가고 에드거와 캐서린은 결혼을 하게 된다. 후에 많은 돈을 벌고 돌아온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을 다시 찾고, 자기를 버린 캐서린을 아프게 하기 위해 에드거의 누이인 이사벨라와 결혼을 하여 린튼을 낳는다. 또한 자기를 괴롭혔던 힌들리 언쇼를 도박판으로 끌어들여 그의 모든 재산을 빼았고 그의 아들 헤어튼 언쇼를 망나니로 키워내기까지 한다. 히스클리프의 마지막 복수는 자신의 아들인 린튼과 캐서린-에드거의 딸인 캐시를 결혼시켜 양 가문의 모든 재산을 차지하는 것이다. 결국 모든 계획은 성공하지만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을 잊지 못한 채 죽고 아들 린튼마저 죽어 모든 재산은 캐시에게 넘어간다.(린튼의 부인으로서) 끝으로 제대로 교육받지 못해 짐승과도 같았던 헤어튼 언쇼가 캐시에게 교육을 받으면서 사랑에 빠지는 것으로 3대에 걸친 두 가문은 드디어 하나로 이어진다.
◆ 1800년대 초반의 사회상: 200년 전에도 사랑을 했었고 200년 후에도 사랑을 할꺼다. 누군가는...
로맨스 소설적인 재미는 둘째 치고 이 소설에서 우리는 두가지의 중요한 당시 시대상을 찾을 수 있다. 하나는 청교도 가치관이 사랑과 결혼을 비롯해서 삶에 미치는 영향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던 문명을 떠난 삶을 정확하게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예가 하인인 조셉영감의 가치관인데 지금으로서 광신자 같은 그의 이야기를 아무도 제지하지 않는다. 뿐만아니라 어린이를 대하는 어른들의 모습이 너무나 엄격하고 학대에 가까운데 이 부분은 영국의 청교도 적인 육아관이 그대로 들어가 있는 대목들이다. 이 소설에서만 특징적인게 아니라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런 식의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식탐을 금하는 청교도적 문화가 영국의 음식문화를 형편없게 만들었다는 설이 있을 정도니... 또 어두워졌을 때 길을 나서는 것이 목숨을 건 일 중 하나로 비춰진다던지, 비를 맞고 감기에 드는 것 하나도 엄청나게 위험한 상황이라는 식의 연출들은 현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설정들이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은 모두 부차적인 문제고 이 소설의 핵심은 역시나 사랑이다. 캐서린과 히스클리프는 자존심에서 비롯된 사소한 오해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그 결별이 다음세대의 불행까지 이어진다는 점에서 현재의 막장드라마스러운 면모를 가지고 있다. 그들의 사랑이 순수함과 아름다움이 아니라 惡과 집착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러나 그러한 집요함과 맹목이야 말로 <폭풍의 언덕>을 세기를 뛰어넘는 명작으로 만들어 주었다. 예나 지금이나 평범함을 넘어선 비범함이 이목을 끄는 법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틀림없이 너 나 할 것 없이 누구나 자기를 넘어선 자기가 있고 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법이야. 나라는 존재가 오로지 나에게만 국한된다면 세상에 태어난 보람이 어디 있겠느냐 말야. 이 세상에서 나의 가장 큰 비참함은 히스클리프의 비참함이었어. 나는 처음부터 그 불행의 각 품목을 지켜보고 느꼈어. 삶에서 내 머릿속을 전적으로 차지하고 있는 것은 히스클리프야. 다른 것이 모두 없어져도 히스클리프만 남는다면 나는 계속 살아갈테지만, 다른 모든 것이 남고 그가 살아진다면 이 우주는 지독히 낮선 곳이 될꺼야. 나는 우주의 일부로 보이지 않을 거고. 넬리, 나는 히스클리프야. 그는 늘 내 마음속에 있어. 나 자신이 내게 늘 즐거운 존재가 아니듯 그가 즐거운 존재가 아니라 나 자신의 존재로서 내 마음속에 있는거야.
이렇게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사랑은 일반적인 범주를 넘어선 것이었다. 그런 그들이 사소한 오해로 틀어지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감성이 얼마나 작고 연약한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집요한 복수와 죽음을 넘어선 재결함에서는 그 반대를 보여주기도 한다. 비극적인 첫번째 연인의 마지막에 이어지는 새로운 젊은 연인들의 탄생은 어려움이 있더라도 언젠가는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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