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함에 관한 짧은 동화
책 맨 앞에 써있는 글귀가 눈길을 강하게 잡아끈다. '계절은 아름답게 돌아오고, 재미있고 즐거운 날들은 조금 슬프게 지나간다.' 앞뒤가 바뀐 것 같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아름답게 돌아오는 계절을 먼저 맞이하고 보면 재미있고 즐거웠던 날들에 대한 아쉬움과 슬픔이 느껴진다. 동화같은 이 이야기는 이렇게 철없어 보이는 어른들의 즐거운 나날과 공허함에 대한 이야기다.
이야기를 읽기 전에 이 이야기가 동화에 가깝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주인공은 오이, 숫자2, 그리고 모자다. 별명이 아니며 인간이기도 하면서 이름의 의미대로 살아가기도 하는 존재들이다. 의인화도 아니고 환상문학적인 설정이니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이름이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는 않지만 각 주인공의 정체성을 규명해 주는 단어라고 생각하면 될것 같고 또 세명의 친구들이 각각 다른 성격과 존재라는 걸 나타내기도 한다.
숫자2, 모자, 오이
'호텔 선인장'이라는 아파트가 있다.(호텔이 아니다) 오래되고 낡은 이 호텔, 아니 아파트에는 각 층마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1층에 사는 숫자 2와 2층에 사는 오이, 3층에 사는 모자가 친구가 되어 즐겁게 살아간다. 인물들의 성격이 매우 중요한데 1층에 사는 숫자2는 공무원이다. 분명치 않은 것을 견디기 어려워하고 성실하지만, 한편에서는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그렇지만 친구들에 대한 애착도 강하며 성격 탓에 우정을 분명케 하기 위해 애쓴다. 술을 못마시는 대신 자몽주스를 마신다. 오이는 2층에 살고 있으며 운동을 좋아한다. 깊게 생각하지 않고 가끔은 남에게 피해를 주기도 하지만 결코 심성이 나쁘지는 않다. 낙천적인 성격인데다 개인과 가족을 아끼는 성격이고 맥주를 즐긴다. 위스키를 즐기는 3층의 모자는 '나중 일이야 내 알바 아니지만'을 입에 달고 사는 시크한 독서광이다. 오이와 숫자2의 층간소음 문제로 친해지게 된 사람은 한 여인을 동시에 사랑하기도 하고 오이의 고향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기도 한다. 늘 맥주와 위스키, 자몽주스를 마시면서..
내 삶의 <호텔 선인장>은 어디에...
그렇지만 즐거운 한 때는 언젠가는 끝나는 법. 호텔선인장이 철거 됨과 동시에 셋은 뿔뿔이 흩어진다. 숫자2가 강하게 저항해 보았지만 일은 늘 순리대로 흐른다. 호텔선인장은 철거되고 오이와 숫자2는 각각의 집을 얻었으며 모자는 여행을 떠난다. 하드보일드하게... 숫자2와 오이는 헤어진 이후에도 종종 만났지만 이런 만남이 늘 그렇듯 점차 뜸해진다.
처음 얼마간 2는, 당연히 매일 밤이다시피 오이의 아파트로 놀러갔습니다. 그곳에서 특제 달걀부침개를 먹고, 라디오를 듣고, 오이의 새로운 친구인 버섯학자를 소개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2의 직장에서도 아파트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2의 방문은 점차 뜸해졌습니다.
에쿠니 가오리는 이 글을 통해서 즐거운 한때가 지나가는 공허함을 통해서 현재의 주변을 다시한번 돌아보라고 말한다. 동화같은 추억이야기는 환상적이지만 한발자국 떨어져서 살펴보면 우리 주위에도 오이, 모자, 숫자2, 검은 고양이가 존재한다. 삶에 대한 불평 대신 내 호텔 선인장이 어디인지, 아직 허물어지지는 않았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는게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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