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수레의 책읽기

[적의 화장법] 적은 화장을 하고 내곁에 있다

슬슬살살 2014. 8. 5. 22:35

◆ 적은 누구고 화장법은 무엇인가


첫 장부터 궁금증을 유발하는 시작,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전개, 숨막히는 반전, 적절한 지적 허영, 명확한 주제의식, 거기에 1시간 남짓이면 읽을 수 있는 짧은 소설. 이 정도면 완벽에 가까운 대중문학이자 모든 작가들의 이상향일게다. 전세계의 수많은 작가들이 이를 위해 밤낮으로 글을 쓰고 있지만 이 경지에 이르는 건 극 소수의 천재 작가들 뿐이다. 그런데 삼십대 중반의 프랑스 작가가 여기에 다다랐다. <적의 화장법>. 놀라운 소설이다.

 

때때로 제목은 작품의 본질을 드러낸다. <적의 화장법>이 아주 좋은 예다. 여기서 적은 enemy, 나의 대적자를 의미한다. 화장법은 cosmetic이라는 여성의 미용을 의미하지 않는다. 화장법은 가면, 위장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적이 무언가로 위장을 했다는 뜻인데, 그 적은 누구인가.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 적의 정체를 찾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단순하고, 심오하다.


작품의 설명에 앞서 이 글이 굉장히 쉬운 텍스트라는 점을 먼저 짚고 넘어가야겠다. 다소 심오할 수도 있는 주제를 아멜리 노통은 새로운 방식으로 다루고 있다. 아니, 사실 새롭지 않은 방식이지만(내 안의 또다른 자아와 이야기하는 설정은 전혀 새로운 방식이 아니다) 그 사실을 우리는 너무 늦게 깨달을 수 밖에 없다. 어떠한 설명도 없이 공항의 이방인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에서 그 뒤를 예측하기란 녹록치 않다. 생각할 만한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는 것으로 독자의 예측을 차단했는데 그 방법이란 것이 쉬운 글쓰기이다. 공항에서 나타난 이방인이 말을 건넨다. 미치광이 같다. 라는 설정은 누구나 쉽게 이해하면서 그 직후의 이야기를 궁금해 하게 만든다. 너무 쉬워서 저 멀리 예측하기를 독자 스스로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다. 후반부로 갈 수록 심오한 철학서들을 인용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읽는 독자로 하여금 지적 허영에 빠지게 할 뿐 결코 어려워지는 설정은 아니다. 초보운전자에게 나타난 조금 과한 커브길 정도일 뿐 가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는 뜻이다.

 

적은 나로 화장한다. (스포일러)

 

출장을 위해 공항에서 기다리던 제롬 앙귀스트는 비행기의 연착 소식을 듣고 짜증이 난다. 설상가상으로 알지 못하는 네덜란드인이 다가와 귀찮게 말을 건넨다. 제롬이 듣든 안듣든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 놓는데 대해 제롬이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끈질기게 따라다닌다. 그의 이름은 텍셀 텍스토르. 제롬은 도망치기를 포기하고 시간이나 때울 요량으로 그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한다.

 

텍셀은 어릴 적 사람을 죽인 적이 있다. 물론 실제는 아니고 마음속으로 기도했더니 자기가 싫어하던 아이가 죽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고양이밥을 훔쳐먹으며 쾌감을 느꼈다는 이야기도 한다. 여기까지는 또라이의 신세한탄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는 장난이 아니다. 절대로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원하는 바를 행하기만 하는 성격의 텍셀은 처음 본 여자에게 사랑에 빠지고 그녀를 겁탈한다. 헤어진 후에도 그녀를 잊지 못했고 10년 전 우연히 그녀를 만났다. 그를 알아보지 못한 그녀가 그를 집으로 초대했고 텍셀은 그녀를 죽였다. 죽인 이유가 바로 사랑.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이라는데 그 이유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녀를 겁탈하고 그녀를 죽인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제롬은 엄청난 충격에 빠지고, 여자의 이름을 듣자 엄청난 분노에 휩싸인다. 그녀는 그의 아내였다. 텍셀은 그에게 자신을 죽일 것을 제안하지만 제롬은 그를 경찰에 넘길 생각으로 결정적인 증거를 잡기 위해 유도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여유롭고 뻔뻔한 텍셀은 모든 질문을 유유히 빠져 나간다. 이 때 엄청난 반전이 나오는데 텍셀이 제롬의 다른 인격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가장 어두운 부분, 남들에게 보여지지 않지만 자기 안에 내재된 뻔뻔한 인격. 그것이 바로 적이었다. 제롬은 머릿속에서 그녀를 강간하는 상상을 했고 그녀와 결혼했다. 10년 전 그녀를 죽였다. 그리고 다시 10년이 지난 지금, 스스로의 내면을 마주했다. 제롬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텍셀을 죽이고 자유를 찾을 것인가. 아니면 다시 스스로의 내면에 텍셀을 놓아둔채 출장을 떠날 것인가.

 

뭐라 설명할 수 없을 그 자살행위를 목격한 증인들은 자세한 장면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벽에다가 머리를 처박을 때마다 그 남자는 똑같은 고함소리로 자신의 동작에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가 외치던 소리는 이런 것이었다. "자유! 자유! 자유!"

 

어느날 자기의 어두운 내면을 마주한다면
누구에게나 어두운 자기는 있다. 지나가던 여성에게 가지는 응큼한 생각, 맘에 들지 않는 이에게 상상으로 가하는 폭력, 체면때문에 하지 못했던 수많은 일들. 상상속의 나는 이 모든 것을 하고 있고 숙명론적인 자신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들은 죄의식이라는 형태로 숨어있다가 특정한 계기가 있으면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어쩌면 그 죄의식은 공항이나 버스정류장, 길을 걷다가 당신에게 불쑥 나타날지도 모른다. 또다른 텍셀이 당신에게 말을 건다. "실례합니다."

 


적의 화장법

저자
아멜리 노통브 지음
출판사
문학세계사 | 2012-12-27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프랑스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 아멜리 노통대사의 딸로서 일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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