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수레의 책읽기

[하비로] 현세의 지옥을 관통하는 단테의 사랑

슬슬살살 2014. 8. 11. 22:56

◆ 판타스마고리아


상하이의 거리이름을 따서 지은 <하비로>는 여러가지 면에서 부족함이 많은 작품이다. 추리 스릴러라는 관점에서만 바라본다면 억지와 비약이 심해 제 값을 못하는 장르소설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재미는 20세기 초반 암울하고 어두운 상하이의 모습을 여과없이 그려내고 나라없는 민생들의 타락과 좌절을 뒤섞어 놓은데 있다. 판타스마고리아만큼 이 책의 느낌을 잘 표현하는 단어가 없다. 원래 환등기의 투사 이미지를 뜻하는 판타스마고리아1는 자본주의의 거대도시, 집단무의식, 꿈구는 집합체 등을 두루 의미한다. 이 책의 배경으로 쓰인 상하이보다 이에 걸맞는 곳은 단언컨대 없다.

 

콤메 에 두로 칼레(인생 행로는 얼마나 쓰라린가)2 스포일러


광복전 상하이. 이곳의 일원으로 암울한 현실의 식민지 조국을 뒤로한 조선인들이 있다. 이준상은 태평천국에 대한 역사를 연구하던 엘리트 출신이지만 상하이에 도착하던 날 아내를 잃어버리고 프랑스 조계3(상하이의 행정구역)에서 경찰 일을 하고 있다. 어느 날 조선 출신의 청년 예술가 집단인 보희미안 구락부에서 사람이 죽는다. 박서진. 말끔하게 생긴 이 청년은 죽기 한달 전 모임에서 이준상과 만난 적이 있다. 그런데 갑자기 처참하게 살해된 채 발견된 것이다. 시체의 형태로 보아 잔인한 연쇄살인마인 상하이 넥타이4의 짓임을 짐작한 준상은 서진의 사라진 여자친구 리리를 찾아 나선다.

 

추적을 거듭할 수록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다. 곳곳에서 이준상과 그의 와이프의 흔적들이 발견되고 와이프가 사라진 이후의 기억이 가물가물한 준상으로서는 어렴풋이 이 사건과 자신이 모종의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음을 눈치챈다. 수많은 사람들이 연쇄적으로 죽어나가고 전설로만 알려졌던 보물지도까지 등장하면서 상하이의 모든 범죄집단이 리리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된다.

 

복잡한 구성에 비해 후반부는 좀 맥빠진다. 태평천국5되살리기 위한 창생교라는 집단이 있고 이 모든 일은 상제교주 박서진이 다른 계파인 창생교를 흡수하고 자신의 교단을 부흥시키기 위해 꾸민 일이었다. 그에게는 실질적인 행동대장 격인 <불칼>이 있었는데 그가 상하이 넥타이이자 이준상이다. 이준상은 창생교의 비전인 타심통6으로 반 최면 상태에서 상하이 넥타이 행세를 하고는 기억을 잊고 산 것이었다. 그럼에도 와이프에 대한 사랑만큼은 진심이었으나 그마저도 박서진의 계획중 일부였던 것이다. 미남자인 박서진은 여장을 하고 가상의 인물 리리를 만들어 내었으며, 자신이 죽은것처럼 위장했다. 그리고 있지도 않은 보물지도를 흩뿌려 상하이의 모든 범죄조직을 수면위에 올려놓고 전쟁을 부추겼다.

 

죽은 줄 알았던 이가 범인이라는 설정, 여장남자, 본인이 범인, 기억상실과 같은 소재들은 수많은 작품에서 차용된 클리셰로 이인화가 그들을 뒤섞어 새로운 작품에 복잡성을 가미해 풀어 놓았다 한들 결코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리고 뒤섞인 결과물도 신선하다 할 순 없을거다. 그렇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이 책의 묘미는 상하이 그 자체에 있기 때문에 독자들은 충분히 작품속에 빠져 들 수 있다.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아편 향을 맡는 느낌의 어지러움. 독립의 '독'자도 사용하지 않고도 조국의 암울했던 현실을 떠올리게 하는 염세주의7가 이 책 전반에 녹아있다.

 

◆  또 한명의 <단테>를 만들어내다.

 

패배란 무엇인가? 세상의 타격에 실망하여 마음으로부터 사랑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마음에 사랑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큰 권세를 누리고 돈과 명예를 얻어도 패배자이며 지옥의 밑바닥을 기는 자이다. 승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짓밟히고 또 짓밟혀도 내면이 부서질 때까지 전진해서 끝내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다. 베아트리체를 사랑했다는 단 하나의 사실 말고는 단테는 구원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 단테의 적막.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로 인해 더욱 충실해진 단체의 인생의 적망. 그것만이 그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었다. -작가의 말 중에서

 

작가의 말에서 보다시피 이 책을 집필할 당시의 이인화는 단테에 빠져서 자신의 소설속에 그를 구현하고 싶어했다. 그 결과물이 이준상이다. 단테에 비하면 너무나도 표피적이지만, 그 역시 작품 내에서 사랑을 하고 있는 유일한 인간이며 현세의 지옥도를 살아가는 인물임은 확실하다. 소재, 전개의 진부함도 보이지만 작품 전체를 꿰뚫는 건 이준상의 사랑이다. 그 결과가 어떨지는 끝까지 읽고 볼 일이다.

 


하비로

저자
이인화 지음
출판사
해냄출판사 | 2004-12-1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역사로부터 자유로운 상상력의 괴력! 우리 시대 최고의 스토리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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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발터 벤야민 참조 [본문으로]
  2. 단테의 시 中 [본문으로]
  3. 당시 상하이는 4개 조계로 구분되어 각각 열강들이 치안업무를 수행했다. [본문으로]
  4. 목 아래를 칼로 긋고 혀를 길게 빼 놓는 잔인한 수법을 보여 이렇게 별명 지어진다 [본문으로]
  5. 이는 이준상의 연구와도 관계있다. 이준상은 과거 동양문화로 인류발전을 설명하기 위해 태평천국에 대해 분석한 논문을 집필한 바 있다. 준서와 리리의 뒤를 쫒으면서 이 연구의 흔적들이 튀어나온다. [본문으로]
  6. 일종의 사이코메트리 계열의 정신수련법인데 이게 등장하면서 소설의 중심이 좀 흔들린다. [본문으로]
  7. 사실 중반부까지만 하더라도 독립과 관련한 이야기겠거니 생각하게 만든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