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도 제작되어 큰 인기를 누렸던 <냉정과 열정사이>는 두 권의 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종의 콜라보레이션 작업인데 지금은 흔히 볼 수 있는 작업이지만, 이 책이 나오던 시기만 하더라도 신선한 시도였다. 한편의 로맨스를 남자와 여자 입장에서 각각 그려낸다는 아이디어보다는 그걸 쓰는 당사자가 에쿠니 가오리와 츠지 히토나리라는 점이 더 이슈가 됐었다. 둘 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20대 여성에게 상당히 어필하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물론 츠지의 경우는 <냉정과 열정사이>가 대표작이기는 하다. 음악으로 말하자면 썸의 정기고와 소유의 협업 쯤으로 볼 수 있겠다.
각 권의 특징을 살펴보기 전에 줄거리부터 보자. 이 이야기는 헤어진 남녀가 다시 만나는 과정을 담고 있다. 20대에 열정적인 사랑을 나눈 준세이와 아오이는 아오이만이 알고 있는 이유로 헤어지게 되었다. 십년이 지난 후에도, 피렌체에서 미술복원사로 일하고 있는 준세이와 제네바에서 미국인인 마빈과 새로운 삶을 지내고 있는 아오이는 아직도 가슴 한켠에 서로를 품고 있다. 준세이는 아오이가 자신의 아이를 가졌고 아이를 지우라는 준세이의 아버지 때문에 헤어지게 되었음을 알고 자책한다. 아오이는 마빈과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급작스레 알게 된 준세이의 소식에 모든 생활을 정리한다. 둘은 10년 전 장난 삼아 한 약속, 아오이의 서른살 생일에 피렌체의 두오모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을 떠올리고 다시 만난다.
- 약속할 수 있니?
- 무슨?
- 내 서른 살 생일날, 피렌체의 두오모, 쿠폴라 위에서 만나기로, 어때?
- 피렌체의 두오모? 왜 그런 곳에서? 밀라노의 두오모는 안 되니?
- 밀라노 쪽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오모이고, 피렌체 쪽은 세계에서 가장 멋진 두오모라고, 페데리카가 말했어)
(중략)
- 서른 살. 앞으로 십년 후의 일인데
피렌체의 쿠폴라의 두오모. 이곳에서 둘은 재회한다.
피렌체의 느낌 그 자체가 준세이의 마음과 같다. 미래로 갈 수 없는 낡음.
줄거리만 봐서는 통속적인 일일드라마 수준이다. 가족의 반대가 등장하고, 열정적인 사랑과 장난스레 했던 약속이 있다. 그리고 서로를 잊지 못하는 연인들의 만남까지.. 삼류도 이런 삼류가 없을 정도의 내용이다. 이 빈약한 줄거리의 어떤 점이 독자들을 매혹시킨 것일까..
먼저 츠지 히토나리의 Blu편부터 살펴보자. 한자어로 아오이(靑)가 Blue다. 츠지의 글은 여성들의 워너비를 담고 있다. 이탈리아의 피렌체를 배경으로 하고 미술 관련한 일을 하고 있다. 준세이의 주변은 맑고 깨끗한 이탈리아의 하늘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20대의 여성치고 이탈리아에서의 열정적인 사랑을 꿈꾸지 않은 이가 얼마나 있겠는가. 남성 독자는 준세이를 어떻게 바라볼까? 적어도 첫사랑을 잊지 못하면서도 할 건 다 하는 부러운 놈으로 보이면서도, 인간적으로 느낀다. 좋아하는 것을 넘어서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준세이는 남성의 눈에도 섹시하다.
복원사 일을 하고 있는 준세이는 과거의 일을 복원한다는 상징이다. 과거의 것을 복원해서 미래로 전달하는 일.. 그의 사랑은 과거에 완벽했고 시일이 지나 망가졌다. 과연 준세이가 자신의 사랑을 복원해 미래로 전달 할 수 있을 것인가.
츠지의 글에는 복선이 많다. 가롯 유다를 상징하는 조반나와 함께 최후의 만찬이 등장하기도 하고 지속적으로 라파엘로와 준세이를 동일선상에 놓으려는 움직임도 보인다. 이렇게 츠지의 글은 생각하고 쓴 글이다. 치밀하게 계산하고 있고 심미적인 메세지를 담아내려 애쓴다. 개인적으로 그의 글은 멋있지만 인간적이지 못하다.
라파엘로의 <대공의 성모자>
이 그림은 츠지의 글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준세이에게 아오이는 이 그림에서의 마리아 같은 존재다. 그런데 아이러니 한 것은 이 그림을 그려낸 이가 라파엘로라는 점.
준세이는 계속해서 라파엘로와 대칭한다. 준세이는 아오이를 그리고, 아오이는 준세이에게 중요한 존재가 되어 간다.
에쿠니 가오리의 Rosso는 어떨까. 에쿠니가 그려낸 아오이는 담백하다. 마빈이라는 완벽한 미국인과 동거하고 있으며 삶의 질은 높은 수준이다. 파트타임으로 보석가게에서 일하고 있으며 매일 즐기는 목욕과 좋은 친구들이 주변에 있다. 마빈은 모든 면에서 완벽하며 그녀를 매우 사랑한다. 이런 아오이의 삶에 옛 친구이 다카시가 나타나 준세이의 소식을 전하면서 그녀의 삶에 파문이 인다. 아오이의 삶은 완벽해 보이지만 준세이가 없음으로서 수조 안의 삶 같다.
에쿠니는 복잡한 복선이나 상징, 비유를 담지 않았다. 상당히 심플하고 섬세하게 아오이의 내면을 담아내어 남자인 나 조차도 그녀의 복잡한 심리상태가 이해 갈 수 있도록 만들었다. 아오이에게 준세이는 "I was so in Love with him" (홀딱 빠졌었어) 인 남자인 것이다. 특히 에쿠니는 장소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인다. 아오이는 끊임없이 있어야 할 곳을 찾는 작업을 해 나간다. 이탈리아, 일본, 미국? 이에 대해 에쿠니는 페데리카의 입을 빌어 답을 들려 준다. "사람의 있을 곳이란, 누군가의 가슴 속밖에 없는 것이란다". 그렇다. 결국 사람은 사랑하는 이의 가슴 속에만 머물 수 있으리라.
이렇게 단순한 러브스토리를 두 작가가 풀어가는 방식은 너무나도 다르고 주제의식도 다르다. 츠지가 남성으로서의 섬세함과 작품으로서의 삶을 다루고 있다면 에쿠니는 여성의 있어야 할 곳으로서 남자를 바라본다. 그것이야말로 남녀가 사랑하는 이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마지막으로 결론을 살펴보자. 이 글에서 두 남녀가 서로를 바라보는 관점이 동일한 부분이 두개 있다. 하나는 상대방을 완벽한 인간으로 인지하고 있다는 것과 10년간의 공백이 둘 사이에 장벽으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내가 끼어들수 없는 장소에서, 이 사람은 이미 새로운 인생을 쌓아가고 있다".
아오이 편에서 둘은 피렌체의 두오모에서 재회한 후에 3일간 함께 지내고 다시 헤어지게 된다. 준세이의 편은 한발자국 더 나아간다. 아오이를 보낸 준세이는 다시 미래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그녀를 붙잡는 기차를 잡는다.
한번도 가보지 못한 이탈리아다. 두 권의 소설은 그늘 하나 없이 쨍쨍한 피렌체를 떠올리게 만들어 주었으며 밀라노의 두오모를 올라갈 수 있게 도와 주었다. 사랑하는 여성을 직시 할 수 있었던 옛날을 돌아보게 만들어 주었다. 무었보다 읽는 내내 와이프를 떠올릴 수 있었다. 발간 15년이 지난 지금에도 두 거장의 필력은 여전히 위대해서, 사랑 그 자체를 떠올리는 훌륭한 매개체의 역할을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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