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수레의 책읽기

[다시읽는 김승옥] 서늘한 새벽같은 소설집

슬슬살살 2014. 10. 13. 22:48

팟캐스트에서 이동진 기자의 빨간책방을 듣고 김승옥이 읽고 싶어졌다. 사실 그 전까지는 <무진기행>정도만 귓등으로 들어봤을 뿐인데 그런게 나뿐만은 아닌지, 사고 싶었던 <무진기행>은 품절이다. 헌책방을 뒤지러 갔다가 단편 세편이 수록되어 있는 <다시 읽는 김승옥>을 구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서울, 1964년 겨울>이라는 쓸쓸한 제목의 표제작과 <역사(力士)>,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가 실려 있다. 표지를 비롯해 내지의 삽화들이 상당히 인상적인데, 어릴 적 읽던 명작집을 다시 꺼내 보는 느낌이다. 삽화는 이승원씨인데 2006년 볼로냐 국제도서전에서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선정된 적도 있는 실력파 작가다. 삽화는 김승옥님의 글처럼 인물의 인상을 뿌옇게 투영한 듯한 것들이 대부분인데 소설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새벽의 기운이 잘 드러난다.

 

<서울, 1964년 겨울>은 선술집에서 만난 세 남자의 이야기이다. 죽은 아내의 시체를 병원에 단돈 4천원에 팔고는 그 돈을 다쓰고 자살을 하는 한 남자와 우연히 그와 동행한 두 청년의 이야기이다.

"우리가 너무 늙어버린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린 이제 겨우 스물 다섯살입니다."

 

스물 다섯의 젊은 청년 둘이 십여살 많은 가장의 자살을 지켜 보며 늙어 버린 모양이다. 어쩌면 비전 없는 자신들의 미래가 거기에 투영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김승옥이 바라본 1964년 겨울의 서울은 그렇게 미래가 없는 때이다. 그래도 김승옥은 실낱같은 희망을 품었는데 화자 중 한명인 '안'이 꿈틀거림을 사랑한다고 했을 때이다. 꿈틀거림이란 그나마 암울한 현실에서 자라나는 작은 움직임을 의미한다.

 

<역사(力士)>는 조금 더 위트가 들어간 이야기이다. 가난했던 이가 부유한 양옥집의 하숙으로 옮기고 겪는 괴리감이 이야기의 주제다. 모든게 완벽해 보이는 양옥집의 가족은 수족관 안의 물고기처럼 현실과 떨어진 삶을 살고 있다. 규칙적인 양옥집의 가족 생활은 삶의 균형을 깨뜨리는 그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는 단호한 할아버지 때문에 위태하게 유지된다. 이러한 삶을 깨뜨리기 위해 주인공은 이 가족들의 물에 흥분제를 탄다. 물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 가족과 가장 대비되는 인물이 '서씨'라는 중국의 역사다. 서씨는 속칭 '잡부'일을 하고 있지만 밤에는 몰래 동대문에 올라 바위를 바꿔놓는 일을 하는 숨겨진 역사다. 자신의 욕망, 내력을 감춰진 공간에서 실현하는 서씨와, 그 어떠한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는 무미건조한 물질만능 가족과의 비교가 이 소설의 포인트다.

 

"어느쪽이 틀려 있을까요?"
"글쎄요"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는 약간 난해하다. 몇개의 챕터로 구분되어 있는데 각각의 구성이 조금씩 달라 갈피를 잡기가 어렵다. 전체적인 줄거리는 도시에 다녀와서 말을 잃은 누이에 대한 이야기이자, 시대 흐름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작가인 주인공, 그리고 그 작가를 한심하게 바라보는 또다른 주인공의 이야기다. 김승옥은 차가운 도시화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을 여기에서 표현하고 싶었던 듯 하다. 여기에 또다른 주인공의 입을 빌어 본인을 한심한 날라리로 표현한다. 물론 우리는 "나는 착한 사람입니다"라는 마지막 거짓말을 하는 김승옥을 볼 수 있지만, 기성세계는 끝까지 그걸 모른다. 어쩌면 이 작품은 "김승옥을 이해하기 위하여"라고 고쳐야 하지 않을까.

 

앞서 김승옥의 소설을 '서늘한 새벽 같은'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읽으면서 계속 그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상쾌하지 않고 약간 매캐한 공기가 녹아 있는 뿌연 새벽이 떠오르지만, 결코 암울하거나 염세적이지는 않다. 행간에 녹아 있는 미세한 희망을 놓치지 말자. 요즘 나온 소설집보다 초라하고 편수도 적지만 이승원씨의 일러스트는 소장할 만 하다.

 

 


서울 1964년 겨울

저자
김승옥 지음
출판사
맑은소리 | 2010-01-2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감수성의 혁명’ ‘전후(戰後)문학의 기적’ ‘단편소설의 전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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