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잃어버린 문제, 표류하는 답안지
'소설가 8인의 잃어버린 여름을 찾아서'라는 중2병스러운 부제를 달고 있는 단편 엮음집이다. 총8편의 작품이 실려있지만 그 어느하나 쉬이 읽히는 작품이 없다. 대부분 '망상'과 '환상'이라는 주제를 부여받은 실험적인 작품들이다. 작품마다 너무 괴이한 실험적 요소가 강하게 들어가다 보니 정작 소설로서의 재미는 찾기 어렵다. 출판사에서 돈이 되지 않을법한 실험을 해 나가는 건 바람직한 일이지만 편집국의 불친절함은 독자를 두 부류로 나누어 버렸다. '한국 스릴러'라는 카피에 낚였다고 생각하는 부류와 이렇다 할 해석없이 난해한 문장 속에 휩쓸려 버린 조난자들. 그 어느 쪽도 출판사에서 바라던 바는 아니었을 게다.
이런 류의 책에는 기획의도라는게 존재한다. 출판사의 기획의도에 따라 소설가들은 집필하거나 기존의 작품 중 가장 어울리는 작품을 내놓는다. 그 어느쪽이건 기획의도와 맞는 작품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책은 밖으로 드러난 기획의도가 없다. 한마디로 문제 없이 답만 있는 꼴인데 답만으로 문제를 유추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 난해함을 넘어서 문제를 찾아라..
<수록 작품 목록>
· 한유주: 왼쪽의 오른쪽
· 김종호: 디포의 주머니
· 박주현: 3(1975년 6월29일생~1993년 5월5일 사망)
· 서준환: 창백한 백색 그늘
· 김 숨: 노인
· 박솔뫼: 안나의 테이블
· 김성중: 불멸
· 김태용: 나는 언제까지나 젋고 아름다운 것일까
그렇다면 작품 하나하나를 보면서 거꾸로 '문제'를 찾아야 한다. 먼저 <왼쪽의 오른쪽>은 한 남자가 살해 당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정작 중요한 '아침에 일어난 일'을 독자에게는 알려주지 않는다. 이 남자는 은유적으로는 이미 죽어있는 상태이며 소설 후반부 물리적 죽음을 맞는다. '어느 편이 진짜 죽음인가?' 에 대한 고찰이다. <디포의 주머니>를 읽을 때에는 '이상'을 떠올렸다. 수준을 떠나서 문장 사이사이 의미 없는 '하얀물고기'를 집어 넣는 것부터 눈에 띈다. '이 양반이 나랑 퀴즈게임을 하자는 것인가.' 이 소설에서 화자는 사실 사이코다. 상상속의 존재인 디포와 이야기를 하며 B여사를 스토킹 한다. 작가는 스토커로서의 망상을 글로 옮기는 일이 논리적 무결성을 가지는 것이 이상했던 모양이다. 덕분에 읽는 이들은 난해한 싸이코의 머리속을 나침반 없이 헤엄쳐야 한다. <3>에는 생년월일과 사망연월일이 부제로 붙어 있다. 대략적인 나이는 18살. 꽃다운 소녀의 이야기이다. 선생님의 아이를 가지게 되어 살해당한 소녀가 자신의 기억을 마주하는 순간을 그리고 있다.
"나도 소녀였던 적이 있다. 지금은 아니지만" -<3> 중에서
다행히 앞의 세 작품이 가장 난해한 편에 속하고 그 이후의 작품들은 좀 나은 편이다. 서울로 상경해 주위를 의식하며 살아온 아버지 때문에 극심한 정신병과 함께 연쇄적인 자살을 한 가족의 이야기인 <창백한 백색 그늘>과 무기력한 현 세대를 몽환적으로 그려낸 <노인>이 이어 진다.
꿈을 글로 옮 놓은 것 같은 <안나의 테이블>은 '안나'라는 여인이 테이블로 변한다는 내용의 괴기스러움과 극장, 서커스, 나비, 꿈, 곰, 테이블로 이어지는 색채감을 고루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꿈과 망상이라는 본 책 주제에 가장 잘 맞는 작품이다.
그렇다면 이제 수수께끼다.
하나, 만약 내가 다시 안나를 기억해 내고 안나가 사람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바라게 되면 어떨까? 안나는 사람이 될까? 어떻게 다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둘, 극장 안의 곰도 결국에는 테이블이 되었을까? 테이블과 몇 명의 사람들로 단장은 어떤 서커스단을 만들려고 한 것일까?
셋, 나는 이제 테이블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볼까 한다. 침대 위에서 쓰고 바닥에서 쓰고 그러면 안나는 테이블이 별 볼일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될까? 아니면 사람이 되려고 할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까? - <안나의 테이블>중에서
<불멸>은 촛불과도 같은 작품이다. 난해한 글들 사이에서 눈에 익숙한 서사가 이어진다. 전혀 무관한 내용임에도 이상하게 모파상의 <목걸이>가 떠올랐던 작품이다. 똑같은 곡을 동시에 작곡하게 된 4명의 동기생이 서로를 죽이는 이야기이다. 끝까지 '불멸'의 주인이 누군지는 나오지 않지만, 인간 심리의 변화와 스토리의 전개가 명확하게 전달된다. 마지막 작품인 <나는 언제까지나 젊고 아름다운 것일까>는 형사를 꼬시는 꽃뱀 이야기다. 여성에게 홀린 형사의 심리와 그 여성의 참 모습을 마주 했을 때, 그리고 그 여인의 범죄를 알고 돕는 데 까지의 심리를 잘 그려내고 있다.
휠체어가 있기 때문에 내가 다리를 감추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있을 거란 생각을 하는 거죠. 보이는게 먼저인지 말이 먼저인지는 중요하지 않지요. 누가 보고 누가 말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 <나는 언제까지나 젊고 아름다운 것일까> 중에서
◆ 상념 자체를 글로 옮겨낸 작업
리뷰를 적어내려 가다보니 문제, 이 책의 기획의도를 알 것만 같다. 기억 속 깊숙히 숨겨져 있는 망상, 심리를 글로 옮기는 작업들을 한 것이다. 논리적 인과관계가 있는 기억 플로우가 아니라 상념 자체를 표현하는 과정에서 난해해 졌으리라. 이제 <망상 해수욕장 유실물 보관소>의 의미도 어렴풋이 알겠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유실물이 찾기 어려운 것처럼 이곳의 유실물은 내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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